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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독서창고

중국이 말하지 않는 중국

by 행복한게이 2024. 9. 7.

빌 헤이턴 지음 | 조율리 옮김  2023년 09월 19일 출간 

 

이책은 현재 중국이 보여주는 국제사회에 대한 행동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있겠다 싶다. 시진핑이 독재자로 들어서고, 독재정치로 중국인들을 입막음 하면서 중국천하를 꿈꾸는 중국몽에 빠져있는 나라...그래서 중국젊은이들의 황당한 애국정신을 대할때마다 어김없이 엇갈리는 심정도 있다. 왜 중국인시진핑은 이리도 무대뽀정신으로 밀고있을까 ??  중국의 역사는 국가를 이룬적이 없는역사라고 한다. 지역을 장악하는 사람이 바뀌어가며 주변지역에서 조공을 받고 황제라 칭하고...국가라는 개념자체가 없는 곳이다. 게다가 중국이 말하는 한족이 주류가 된적도 없었다는..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한족이 다수인적도 없었던 나라.. 그래서 티베트족, 위구르족, 후이족, 좡족, 조선족...여러 소수민족들을 한족들과 섞이게 만들려고 강제로 이주정책으로 토착민들을 흡수하는전략을 사용해왔다는

,..그런식으로 한족으로 동화시키는 작업을 시행하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에 애국심을 불어넣은 작업을 시진핑이 강하게 밀어가고 있다. 중국이라는 이름도 외부에서 그렇게 불려져서 사용하는것일뿐이지... 이 책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이 부딪히는 역사적인 문제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래서 중국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듯싶기도 하다.

 

저자 소개

지은이 빌헤이턴 Bill Hayton

1995년부터 TV와 라디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98년부터 BBC 뉴스에 몸담았다. 2006~2007년 BBC 특파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되면서 동남아시아 관련 보도를 줄곧 맡았다. 베트남 특파원으로 파견되기 전에는 유럽과 이란, 예멘, 발칸 국가 등 중동에서 활동했다. 「더 타임스 The Times」, 「파이낸셜 타임스 Financial Times」,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 「더 디플로맷 The Diplomat」 등의 잡지에 기고했고, 저서로는 『남중국해: 아시아의 권력투쟁 The South China Sea: the struggle for power in asia』과 『베트남: 떠오르는 용 Vietnam: rising dragon』이 있다. 이 책 『중국이 말하지 않는 중국』은 저자의 방대하고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지금의 중국이 100년 전에 새롭게 발명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이라는 개념조차 100년 전 쑨원 등 혁명가들에 의해 발명되었고, 한족과 중화 민족, 주권과 영토 등도 100년 전에 새롭게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민족주의는 현재 국수주의와 패권주의로 변화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몽으로 대표되는 중국 패권주의의 기원을 보여주고 애초에 중국이라는 신화에 균열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옮긴이 조율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국제통상학 ·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동대학 통번역대학원을 거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캐나다 킹스턴대학교에서 영어 연수를 마친 뒤 주한멕시코 대사관에서 통번역사로 근무했다. 이후 독일에 거주하면서 심리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페인 AULASIC 의학 번역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코칭과 심리 관련 과정을 다수 수료했다. 현재 출판 번역 에이전시 글로하나에서 영어, 스페인어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불안을 이기는 철학』, 『솔드 아웃』, 『조셉 머피 시리즈』 전 5권, 『스토아 수업』 등이 있다.

THE INVENTION OF CHINA

지난 30년간 외국인 저자가 쓴 최고의 중국 해설서!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떤 균열을 겪고 있는가?

 

“현대 중국에 대한 가장 스마트한 해석!”

━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

 

“놀라운 역작. 비범하면서도 높은 가독성을 자랑하는 이 책을 읽으면 중국의 민족 갈등, 영토 분쟁, 강대국 야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 심도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자오쑤이성, 『건설된 민족국가 Nation-State by Construction』 저자

 

“왜 기존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보면 안 되는지 알려주는 책으로, 중국의 실체를 거침없이 담아냈다. 국가명의 기원과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뿐만 아니라 모든 주제에서 저자는 어떻게 중국이 오늘날의 중국을 상상하게 되었는지 확실하면서도 정보에 입각한, 재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 래너 미터 Rana Mitter, 『중국의 선한 전쟁 China’s Good War』 저자

 

“중국은 점점 민족주의적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며 이에 따라 공산당 지도자들이 국가 정체성과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주요한 주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창이 되어준다.”

━ 오빌 셸 Orville Schell, 『부와 권력 Wealth and Power』 저자

 

현대 중국의 핵심을 통찰하는 가장 솔직한 안내서

중국판 『국화와 칼』을 만나다!

© 2020 by Bill Hayton

Originally published by Yale University Press

 

© 2021, Dasan Books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Icarias Agency를 통해

Yale University Press과 독점 계약한 다산북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행동으로 보여 주신

부모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애써 주심에 감사합니다.

 

감사의 말

 

 

 

 

 

이 책은 이스턴 코네티컷 주립 대학교의 브래들리 캠프 데이비스 Bradley Camp Davis 교수와 옴니 뉴 헤이븐 호텔 바에서 나눈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뉴캐슬 브라운 에일 맥주 두어 병을 마시면서 베트남 국경 지방에 얽힌 골치 아픈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순간, 브래들리 교수는 내가 19세기 국경에 관해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고 망설이며 연구하고 글을 썼다. 이 책은 그와 나눈 대화의 결과물이다. 독자들이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만큼 독자에게도 흥미로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식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 준 런던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 도서관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에서 일하는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학문의 세계로 떨리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크레다 (Kreddha,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비영리 단체 - 옮긴이)가 2016년 9월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교에서 개최한 콘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콘퍼런스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거기서 마이클 반 월트 반 프라그 Michael van Walt van Praag, 미크 볼트제스 Miek Boltjes, 오리건 대학교의 고  아리프 디를릭 교수님, 브리티스 컬럼비아 대학교의 티모시 브룩 Timothy Brook 교수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모두 내 꿈을 아낌없이 지지해 주셨다.

앞서 언급한 교수님들은 그중 몇 명일 뿐. 계속되는 어수룩한 질문에 답해 주신 학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다음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의 팀 배렛 Tim Barrett, 앨라배마 대학교의 채드 베리 Chad Berry, 홍콩 성시 대학교의 메이 보 칭, 토론토 대학교의 크리스 청 Chris Chung, 다트머스 칼리지의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Pamela Kyle Crossley, 홍콩 대학교의 스티븐 데이비스 Stephen Davies, 홍콩 대학교의 프랑크 디쾨터 Frank Dikötter, 요크 대학교의 조시 포겔 Josh Fogel, 복단 대학교의 지 자오광, 윌리엄 & 메리 칼리지의 마이클 깁스 힐 Michael Gibbs Hill, 홍콩 성시 대학교의 혼쯔기, 런던 정치 경제 대학교의 크리스 휴즈 Chris Hughes , 웨일스 트리니티 세인트 데이비드 대학의 토마스 얀센 Thomas Jansen,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엘리사베스 카스케 Elisabeth Kaske, 말레이시아 국립 대학교의 청 추위 쿠익, 바오황희 장학 포럼의 제인 룽 라슨 Jane Leung Larson, 라 트로브 대학교의 제임스 레이볼드 James Leibold,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빅터 마이어 Victor Mair,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멜리사 마우트 Melissa Mouat, 예일 대학교의 피터 퍼듀 Peter Perdue,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에드워드 로즈 Edward Rhoads, 코크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율리아 슈나이더 Julia Schneider, 라이스 대학교의 리치 스미스 Rich Smith,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레이첼 월너 Rachel Wallner,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의 제프 와서스트롬 Jeff Wasserstrom, 코네티컷 대학교의 피터 자로우 Peter Zarrow. 모두 감사드린다.

스와드모어 대학교의 조지 인 George Yin 교수님은 번역과 어원에 관한 질문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제프 웨이드 Geoff Wade는 명나라에 관한 부분을 바로잡아 주었다. 에반 파울러 Evan Fowler와 트레이 메네피 Trey Menefee는 홍콩 부분에 조언해 주었다. 에릭 슬라빈 Erik Slavin은 요코하마에서 동행해 주었고 제레미아 제네 Jeremiah Jenne는 베이징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폴 에반스 Paul Evans, 브라이언 욥 Brian Job, 이브 티버기안 Yves Tiberghien은 밴쿠버에 방문했을 때 나를 맞아 주고 도와줬다. 티모시 리처드 Timothy Richard의 증손녀 제니퍼 펠레스 Jennifer Peles와 그의 전기 작가 고  유니스 존슨 Eunice Johnson도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티모시 리처드의 생애와 업적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 계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특히 이 책을 출판하는 위험을 감수해 준 헤더 맥칼럼 Heather McCallum, 글쓰기를 살펴봐 준 마리카 리샌드루 Marika Lysandrou, 제작 과정을 책임진 클라리사 서덜랜드 Clarissa Sutherland와 퍼시 에드겔러 Percie Edgeler, 그리고 꼼꼼하게 교열을 봐 준 샬럿 채프먼 Charlotte Chapman에게 고맙다. 원고를 심사한 익명의 심사위원 세 분도 굉장히 유용한 의견을 주셨다. 이에 감사드린다.

밤늦은 연구를 견뎌 준 BBC 동료들과 출장을 허락한 가족에게 정말 고맙다. 아내 파멜라 콕스 Pamela Cox는 진정한 역사가로, 어떻게 하면 참된 역사가가 될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 주었다. 아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우리 아들딸, 테스 Tess와 패트릭 Patrick도 아낌없는 격려와 행복을 선사해 주었다. 고맙다. 이제 같이 저녁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2020년 3월, 영국 콜체스터에서

 

서문

 

 

 

 

 

중국은 미래에 어떤 나라가 될까? 우리는 중국의 인구수가 엄청날 거란 건 알고 있다. 그리고 현 추세가 유지된다면, 경제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부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초강대국은 어떤 행보를 보일까? 자국민과 이웃 국가, 그리고 다른 국가를 어떻게 대할까? 10억 명 이상의 인구와 대규모 군대, 핵무기를 갖추고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국가는 전 세계에 두 국가밖에 없는데, 중국이 그중 하나이다. 인도가 국제적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한편, 중국을 그러한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정책 입안자들과 분석가들, 평론가들을 지배한다. 중국은 좀 다르다. 중국의 부상을 하나의 기회― 무역, 투자, 이익, 발전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은 숱하게 많지만, 한번쯤 의구심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중국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이 질문에는 손쉬운 답변이 하나 존재하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과 여러 논평가에게 정석이 되었다. ‘백년국치 (百年國恥, 제1차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의 모든 인민이 1949년 중국 공산당에 해방되기 전까지 겪어야만 했던 수치스러운 100년간 굴욕의 역사를 의미한다. - 옮긴이)’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2017년 10월 18일, 시진핑 (習近平, 습근평) 주석은 제19차 중국공산당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을 상징하는 기호, 낫과 망치 앞에 서서 정석적인 답변을 한 문단으로 요약했다.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눈부신 문명을 창조하고, 인류에 놀라운 공헌을 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시진핑은 청중에게 말했다.

 

1840년 발생한 아편전쟁으로, 중국은 내부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암흑기를 맞았고,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전쟁으로 유린당한 인민은 고향이 갈기갈기 찢기는 걸 보며 가난과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헌신적인 애국자들은 끈기와 영웅 정신을 가지고 역경에 맞서 싸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습에 물들어 있는 사회의 본질과 중국 인민이 궁지에 처한 상황 앞에서 그 노력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1

 

이는 과거를 바라보는 특이한 관점이다. 이 말은 1세기 동안 ‘중국 인민’은 외세의 침략을 받은 운 나쁜 피해자였고, 중국의 운명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이 왜 이 관점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중국 인민’이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 중국이 왜 이렇게 변했느냐는 까다로운 질문과 답변을 피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시진핑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가 되었고, 해외에서 거주하는 많은 사람 또한 그러한 역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는 시진핑의 역사관의 면면에 도전장을 내민다. 안타깝게도 이 책과 연구에 드러난 견해는 중국에 대한 담화의 주류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도서관에 있는 책이나 전문 학술 세미나에서 조용하게 다뤄진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관점을 바깥 세계로 내보내려고 한다. 시진핑의 역사관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만고불변의 ‘중국다움’이 아닌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근대 중국의 민족적 정체성과 국경, ‘민족국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정부를 두는 나라 - 옮긴이)’의 개념 모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모든 혁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떻게 중국이 자기 자신을 ‘중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주권, 인종, 민족, 역사, 영토의 개념이 어떻게 중국의 집단주의적 사고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중국’이라는 개념 자체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 엘리트들이 생소한 사상들을 어떻게 채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이 해외로부터 어떤 핵심 개념을 빌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하나의 국가이자 민족이라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그 개념을 어떻게 각색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이 책은 학술적인 작품만은 아니다. 중국 엘리트들이 어쩌다가 근대화 비전을 받아들였는지, 그 안에 어떤 미래의 문제들이 내재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남중국해, 대만, 티베트, 신장웨이우얼자치구, 홍콩에 얽힌 문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오늘날 중국 자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크게 봐서는 100년 전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이 내린 선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채택하고 퍼뜨린 사상이 국가 전체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족히 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라이벌 간에 사상을 논의한 방법과 결정을 내린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볼 때 중국은 여느 나라와 다르지 않다. 현대의 모든 ‘민족국가’―몇 개만 이야기하자면 독일, 터키, 이탈리아, 영국을 들 수 있다 ―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터키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리프 디를릭에게는 친근한 주제다. 구  청나라가 근대 중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불과 몇 년 후 오스만제국이 터키로 이행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단순한 과정―폭력적인 정권 교체―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상 한 사회의 세계관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방식 등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이 주제에 관해 책을 쓰기 시작한 것도 디를릭의 ‘중국’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에 영감을 받아서다. 디를릭은 자신의 소논문에서 제국에서 근대 민족국가로의 변화는 사실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변화는 언어에서부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급속한 근대화가 낳은 문제점들을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전례 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들 ― 아니면 기존 단어의 의미를 수정했다 ― 을 만들어 냈다. 새롭게 창조해 낸 단어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고하게 하고,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 결과 정부가 무너졌다.

실제로 디를릭을 만난 건 단 한 번에 불과하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하기가 어렵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디를릭이 좋았고 디를릭을 통해 이 주제에 눈을 떴다. 디를릭은 근대 중국의 근거가 되는 사상의 출현이 항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신흥 초강대국의 행동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살아 있는 이슈라고 믿었다. 사실 오늘날 중국을 들여다보면 100년 전 사회와 정치의 본질에 관해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고, 이 사상을 믿으라고 국가 ―그리고 더 넓은 세계―의 나머지를 설득한 소수가 승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의 사상은 국가, 국민, 영토, 국경에 관한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과 역사, 지리, 사회 적법 질서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을 무질서하게 융합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의 발명’을 다루긴 하지만, 중국을 저격하여 특별히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모든 근대 국가는 표면상으로 일관성 있고 통일된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과거의 면모를 선별하여 기억하고 잊는 ‘발명’의 과정을 거쳤다. 나는 지금 브렉시트 문제가 들끓고 있는 영국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치체제의 ‘정통성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과 유럽 대륙 또는 아일랜드섬과의 관계, 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연합의 측면들을 선별적으로 기억하거나 잊으려는 정치인들과 논평가들을 매일 본다. 주권과 정체성, 통합을 둘러싸고 억눌러 왔던 문제들이 터지면서 이는 감정과 대립이 나오는 새로운 근원이 되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홍콩은 화염에 휩싸였고, 적어도 100만 명의 투르크계 회족이 ‘재교육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맥락과 결과는 대단히 다르지만, 그 원인은 비슷하다. 민족국가가 만들어 낸 주권, 정체성, 통합 간에는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관광객들은 한때 조공국 사신과 특사, 하급 관료가 드나들던 성문을 통과해 자금성 (紫禁城, 명·청 왕조의 궁궐 - 옮긴이)으로 들어간다. 거대한 붉은 성벽을 지나가면 겹겹이 친 방어벽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 방어벽은 실제로 방어의 기능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면 해자 垓字가 보인다. 남쪽을 향해 휜 활 형태의 해자가 펼쳐져 있는데 이는 적국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해자 너머에는 한때 황실 의식이 열렸던 큰 마당이 있다. 마당을 지나면 황제들이 즉위했던 태화전 (太和殿, 자금성 정전)이 나오며, 태화전 너머로는 보화전 (保和殿, 황제가 조공국 사절단을 위해 연회를 주최한 장소이다. - 옮긴이)이 있다. 자금성의 중심 축선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방문객들은 점차 더 사적인 구역으로 들어간다. 건청궁 乾淸宮, 즉 황제의 침궁 (침실)과 새해와 하지, 동지를 맞이하는 교태전 (交泰殿, 동지, 정월 초하루, 생일 등에 하례를 받던 곳이다.–옮긴이)이 있다. 길은 마지막으로 곤녕궁 坤寧宮으로 이어진다. 곤녕궁은 원래 황후의 거처로 지은 건물이지만, 1645년 베이징이 점령당한 후 청나라는 곤녕궁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다.

청나라는 둥베이 지방 출신의 침략자, 만주족에 의해 세워졌다. 만주족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갖추었고 샤머니즘의 일종인 자신들만의 종교를 따르고 있었다. 만주어와 민속 종교는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청나라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인도를 침략한 영국이나 아라비아반도를 정벌한 오스만제국처럼, 청 엘리트는 일반 대중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간직하고자 했다. 특히 자금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둥베이 지방의 산에서 조상들이 행했던 여러 의식을 지속했다. 둥그렇게 휜 활로 활쏘기를 연습하고, 만주식 춤을 추었으며, 곤녕궁에서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샤머니즘 전통에 따라 매일 아침 예배가 끝나면, 자금성에 거주하던 왕족들은 정전 (태화전)에 모였다. 그리고 돼지를 받아 도축하고 부위별로 요리를 했다. 기름지고 반만 익힌 고기는 그곳에 모인 만주 귀족들에게 넘겨졌다. 귀족들은 가장 맛있는 부위를 너도나도 먹으려고 앞다퉜다. 궁전은 지저분해졌다. 궁전 바닥에는 고기 기름이 덕지덕지 껴 있었고 서까래에는 삶은 돼지고기 냄새가 뱄다. 2  하지만 왕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금성은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아주 은밀하고 폐쇄적인 곳이었다. 너무 은밀한 나머지 황제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눴다 ― 물론 그 후에는 깨끗하게 치웠을 것이다. 궁궐에서 일어난 일은 궁궐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됐다.

이러한 전통은 1911~1912년 혁명 (신해혁명)이 발생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근대 자금성의 수호자들은 황실 생활의 이런 모습을 흐릿하게 지워 버렸다. 중국 황제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천자 天子 하면 생각나는 전통적인 이미지는 기름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보좌에 덤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궁에 남아 있는 만주족의 흔적을 부정하거나 최소화함으로써 관광 가이드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스스로를 지난 수천 년간의 연속적인 역사를 가진, 중국 최후의 통치자라고 여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태평양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영토에 대한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 신장, 몽골, 만주, 대만을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뒷받침한다. 또한 중국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하지만 곤녕궁의 역사가 보여 주듯, 268년 동안 ‘중국’은 만주 제국에게 점령당한 하나의 성 에 불과했다. 히말라야부터 신장 산까지 통치 범위를 확장한 것은 바로 만주족이었다. 1912년의 변천은 이 제국을 뒤집어 놓았다.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비중국적인 제국의 변방도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누가 중국인인지, 중국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했다. 현 중국 수뇌부는 민족주의자들의 후계자이다. 공산당은 중국과 중국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획일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관점을 강제하기로 한 듯하다. 그들은 과거를 특정하게,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누차 정당화시킨다. 중국의 미래 행보를 이해하려면 먼저 역사관의 기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과거 제국의 질서가 무너지고 잔해 속에서 현대의 ‘민족국가’가 등장했던 100년 전을 추적하며 답을 제시한다.

 

* * *

 

용어에 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제목에 쓴 ‘발명 Invention’이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 중국의 발명 The Invention of C hina를 말한다.-편집자). 전문 역사가들은 내가 ‘건설 Construc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길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발명 대신 ‘중국의 건설’이라고 제목을 붙이면 토목공학 서적으로 분류될 위험이 있다. 내가 전하려는 의미는 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 나는 중국이 백지상태로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발명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일관적인 영토와 매끄럽게 이어지는 역사를 가진 중국이라는 사상은 당대에 특정한 환경에서 활동했던 개인들이 상반되는 증거를 뒤죽박죽 섞어 적극적으로 건설/발명된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개인이 차용하고 각색하며 주장한 사상과 논거, 내러티브는 당대의 산물이기는 하나 오늘날까지 중국 지도부의 행동을 지배한다.

또한 나는 ‘중국 China’이라는 용어를 적절한 때만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 이후 시기만 중국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 이전의 국가에 ‘중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국가가 속하지 않는 과거까지 용어―그리고 그 의미― 를 투영하는 민족주의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세월을 거친 땅덩어리를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디를릭은 ‘동아시아의 심장부’라는 표현을 썼다. 편리하긴 하지만 어감이 다소 부담스럽다. 나는 티모시 브룩의 표현을 빌려 1644년에서 1912년 사이의 중국에 대해 ‘대청국 Qing Great - State’이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브룩에 따르면, ‘대국 (Great-State, 大國)’은 동북아시아만의 독특한 통치 형태였으며, 몽골 제국 이후부터 자국을 묘사할 때 대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국’이라는 서구의 용어보다 적절하다. 3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세대 학자들이 수행한 선구적인 연구를 합친 작품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신청사 新淸史’ 학파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조–옮긴이)와 ‘비판 한학’ 학파 (한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조–옮긴이)는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다. 나는 두 학파에 속한 많은 학자의 글을 본문에 인용했고 감사의 말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해 추천 문헌 부분에 문헌 목록을 실었다. 나는 학자들의 전문성에 크게 빚을 졌다. 또, 북미와 호주, 유럽과 일본 대학교들의 학문적 자유 덕분에 중국의 과거를 재검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제들, 즉 주권과 정체성, 통합의 문제 등은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없고 여전히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왜 그런지를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제1장]외부인의 시선에서 탄생한 이름, 중국

 

 

 

 

 

인민대회당 연단에서 시진핑은 행운을 상징하는 여덟 계단을 올랐다. 세 명의 군악대의 트럼펫 소리는 시진핑이 아시아 지역 권력의 단상에 오르는 것을 예고했다. 시진핑 주석은 연단 높이에서 특유의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정부 수석 36명과 국제기구의 수장 여러 명, 그리고 기대감을 품고 기다리는 배우자들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뒤에는 1000명 이상의 외국 대표단이 둘러앉은 126개의 작은 테이블이 인민대회당 구석까지 놓여 있었다. 시진핑은 배열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세트 디자이너는 그렇게 배열을 짰다. 연단에는 한 쌍의 거대한 몽타주가 양옆으로 놓여 있었다.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장소와 기념비를 모은 작품으로, 주빈 테이블의 화려한 꽃장식과 대조를 이뤘다. 내빈 사이에 있는, 테이블 안쪽에 놓인 장식용 연못은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백조가 사이좋게 노닐었다. 공작새는 미니어처 정원을 가로질렀으며 비둘기는 우아한 숲속에서 날개를 펼쳤다.

 

시진핑 국가 주석의 모습

 

2019년 4월 26일 베이징에서 제2회 일대일로 一帶一路 국제 협력 고위급 포럼 개막식이 열렸다. 시진핑은 지역 협력에 관해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 역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수천 년 동안 실크로드는 어떻게 다른 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발전과 번영을 이루고, 교류하며 문화를 살찌웠는지 증명했습니다.” 시진핑이 대표단을 향해 말했다. “오늘날 중국은 무수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우리는 실크로드의 역사에서 지혜를 얻고, 오늘날 윈-윈 협력 관계 안에서 강점을 찾으며, 모든 국가가 발전을 공유하는 밝은 미래로 함께 인도하기 위해서 전 세계 국가와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1

역사, 하나의 특정한 역사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역사는 이러한 행사를 뒷받침한다. 시진핑은 연단에 서서 중국을 동아시아를 자연스럽게 주도하는 국가이며, 어쩌면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이끌 수도 있는 국가라고 유려한 말투로 소개했다. 실크로드의 비유는 하나의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모든 길은 베이징으로 통한다. 이 수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이 처음으로 발명했다. 1838년 근대 지리학의 시조, 독일 지리학자 칼 리터 Carl Ritter에 의해 ‘실크로드’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1877년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 Ferdinand von Richthofen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 Sven Hedin에 의해 1930년대에 널리 알려졌다. 2  이 중 그 무엇도 시진핑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공식적인 역사관에 따르면, 실크로드는 중국이 계속해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걸 증명한다. 중국은 언제나 마땅히 지역 정치의 정중앙에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적 질서이자 미래에 펼쳐질 상황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칼 리터의 모습

 

그러나 시진핑이 이러한 사건들에 투영하는 중국에 대한 관점은 정치적인 주작이다. 이 장에서 나는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중국이 스스로 창조한 사상이 아닌 유럽인들이 가진 중국의 이미지를 아주 많이 차용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실크로드’는 본래 유럽에서 기원하여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역사에 상상 속의 질서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중국’이라는 바로 그 이름은 서양인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동아시아로 돌아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수 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은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보낸 글에서 정보를 모아 ‘중국’이라 불리는 장소의 비전을 창조했다. 그 후 작가와 동양학자들은 이 비전을 확장했다.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중국’은 동아시아 대륙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국가이자 독립 국가, 과거부터 연속적으로 존재해 왔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그 당시 ‘중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1644년부터 1912년까지 ‘중국’은 사실상 내륙 아시아 (Inner Asia,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의 내륙부 지역–옮긴이)의 한 제국, 즉 대청국의 식민지였다. 청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중국 본토 (‘China Proper’, 中國本部, 중국 본부라고도 한다. 중국 본부의 범위는 옛 한나라의 영역과 거의 일치하는데, 만주, 내몽골, 신장, 티베트 등을 제외한 만리장성 이남 지역을 의미한다. 중국 대륙보다는 범위가 좁다.–옮긴이)’― 패배한 명조의 15개 성 ― 는 청에 속하는 한 부분에 불과했다. 청나라 이전의 명나라는 약 3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지만, 중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명나라 이전, 이 영토는 지중해까지 뻗어 있던 몽골 대국의 일부였다. 동아시아는 몽골 대국 영토 한 부분에 불과했다. 몽골 대국 전에는 라이벌 국가인 송 나라, 하 나라, 요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 국가들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영토의 여러 부분을 차지했고, 결과적으로 그전에 존재했던 분열된 국가들과는 달랐다.

국가마다 영토의 범위와 민족 구성은 달랐지만, 그 지역을 통치했었던 국가를 정당하게 계승했음을 스스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라를 통치하게 된 새로운 엘리트 모두는 관료들과 기존보다 더 많은 백성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의 연속성을 주장해야 했다. 즉, ‘천명’을 받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지배 계급의 의식을 행해야 했다. 어떤 시대에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의식을 행했을 수도 있고, 다른 시대에는 정치적 쇼가 되어 버렸을 수도 있는데 몇몇 시대에는 노골적인 속임수로 쓰였다. 몽골과 청 엘리트들은 내부적으로는 내륙 아시아의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한족 통치 전통의 상속자라고 ― 적어도 몇몇 속국에는 ―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한마디로, ‘중국’은 외국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통일되고 경계가 잡힌 국가로 존재했다. 19세기 말까지 중국 지도층은 ‘중국’이라는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외국인들이 그 단어를 썼을 때, 그 단어가 대표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사상가들은 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형성된 다른 어느 것보다 ‘중국’에 특권을 부여하고, 이론적으로는 배후 지역보다 지위를 더 높게 쳐주었다. 서양인들의 마음속에서 ‘중국’은 아시아의 역동적인 엔진이었던 반면 내륙 아시아 국가들은 말을 탄 자국의 무리가 중국을 쳐들어가 부녀자를 강간하고 약탈했을 때만 중국을 주시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역사 무대에서 ‘중국’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반면, 내륙 아시아는 대륙에 계속해서 ‘의지’하는 역할만을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후퇴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실크로드’가 탄생한 것이다. 중국을 교역을 이끄는 국가라고 간주했고, 내륙 아시아 국가들은 단순히 교역의 통로로만 생각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중국’이라는 기발한 관념은 유럽에서 동방과 동남아를 거쳐, 청 지식인들의 사담과 학술지에서 등장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이러한 청 지식인들은 주로 해외에서 견문을 넓힌 사람들이었고, 외부의 시선으로 조국을 돌아볼 수 있었다. 추방지나 유배지에서, 다른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이라는 장소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애타게 찾던 사람들 사이에서 참신한 시각 ― 규정된 영토의 한 부분으로 연속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 ―을 전파했다. 생각의 진화가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국호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오늘날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중국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 (Zhong guo, 中國)과 중화 (Zhong hua, 中華). 어원을 살펴보면, 두 가지 표현 모두 지역적인 우월성을 담고 있다. 둘 다 영어로 ‘차이나 China’라고 번역하지만, 중국어로 두 단어는 특수한 의미를 띈다. 중국 Zhong guo은 말 그대로 ‘중심 국가’로, 이상적인 정치 위계질서를 상징한다. 중화 Zhong hua는 ‘중앙에서 꽃이 피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상 ‘문명의 중심’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내륙 지역의 오랑캐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두 용어의 역사적 뿌리는 깊지만, 19세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국호로 사용하지 않았다. 민족과 국가에 관한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가 사상이 탈바꿈했기에 이 두 용어는 국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두 국호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중국과 중화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광둥성과 푸젠성에 펼쳐진 해안을 따라, 현지 상인과 문인들은 갈레오테 페레이라 Galeote Pereira를 환영했다. 그는 인도 제국의 백단향과 향신료를 저렴한 가격에 팔았다. 사람들은 페레이라가 가져온 식품과 물건에 시장 가격보다 두 배의 값을 쳐줬다. 젠트리 군인이었던 페레이라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포르투갈 고위급 인사들과 연줄 덕분에 사업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유럽에 불어닥친 동아시아 원정 물결의 1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제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자기 계발을 한다는 명목을 앞세운 후, 약간의 가톨릭 교리를 내세웠다. 페레이라는 고향을 떠나 10년간 인도에서 상인으로 활동했다. 시암 (Siam, 暹羅. 즉 오늘날의 태국 - 옮긴이)에서는 용병이었으며, 1548년에는 말라카와 동쪽 지역을 항해하며 동방과 남아시아의 사치품 무역에 종사했다.

총독 (지방 행정구역인 성의 모든 행정을 통할하는 직책 - 옮긴이)과 베이징에 멀리 떨어져 있는 명나라 조정은 갈레오테 페레이라를 싫어했다. 그들의 눈에 갈레오테 페레이라는 외국 밀수입자였다. 포랑지 佛郞機 ―‘프랑크족’ (아랍 상인들로부터 용어를 차용했다)―와의 무역 금지 칙령을 어기면서 밀수품을 들여왔다. 20년 전, 명나라의 외교 의례에 대한 무지와 공권력을 향한 오만한 태도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미 입국이 전적으로 금지된 상태였다. 페레이라와 다른 포르투갈인들은 쫓고 쫓기는 게임을 했다. 중앙 정부의 눈을 피해, 아모이와 리암포 (오늘날 샤먼시와 닝보시에 해당)라 불리는 도시 사이,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수천 개의 섬 사이에 숨어 있다가 지역 상인과 거래를 했다.

1549년 3월 19일, 게임은 끝났다. 푸젠성과 저장성 총독 주환 朱紈은 성 해안경비대에게 밀수 무역을 뿌리를 뽑으라고 명했다. 그들은 샤먼시 근처 주마계 走馬溪 정박지에 소리 소문 없이 숨어 있던 페레이라와 두 척의 배를 발견했다. 그들은 선원들을 내리라고 한 후 성도 (省都, 행정구역 단위인 성의 행정 중심지 - 옮긴이) 푸저우에 있는 감옥에 넣었다. 주환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 현지 부랑자들이었던 96명의 선원이 처형되었다.

주환은 쉬지 않고 법을 집행했고, 이는 결국 주환과 밀수 무역의 꿀맛을 본 지역 유지들 ―‘예복을 입고 모자를 쓴’ 계급 ― 사이를 소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밀수품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같은 편인 황실의 관료들과 주환을 탄핵할 음모를 꾸몄다. 주환이 권한을 남용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범죄자들을 처형하려면 조정의 공식 허가가 있어야 했다. 그 결과 페레이라에 씌운 혐의는 무효가 되었고, 주환은 횡령 혐의를 받았다. 페레이라와 목숨을 구한 선원들은 가벼운 형벌을 받은 한편 주환은 처형당했다.

페레이라는 2~3년간 다양한 형태로 수감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아주 편안한 감옥 생활을 했다. 그리고 결국 뇌물을 주고 풀려났다. 1553년 2월 27일, 그는 이미 자유의 몸이었다. 오늘날 홍콩 밑에 있는 상촨다오 (上川島, 상천도. 오늘날 중국 광둥성 타이산시 서남쪽에 있는 섬 - 옮긴이)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예수회 공동 창설자 ―의 유해 발굴 작업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주 소수의 포르투갈인은 중국에 정착 ― 전향과 밀수를 발판으로 삼았다 ― 하였고, 지방 엘리트들은 눈감아 주며 이 소식이 조정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쉬쉬했다. 하비에르는 예수회가 동양에서 널리 퍼질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었다.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양쪽 진영 모두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무역로를 장악하려고 분투하자, 하비에르는 영성보다 재물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았다.

페레이라는 부하들과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와 명나라에서 경험을 유럽 독자들에게 이야기로 풀어냈고, 이는 명조에서의 삶을 다룬 최초의 글이 되었다. 내용은 놀랍지 않았다. 그의 글은 수감 생활과 처벌에 관한 것이었고, 우상숭배와 남색 행위 (‘무엇보다 가장 잘못한 일’)를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그런데도 그는 도로와 교량의 질, 위생적인 젓가락 문화, 부자들의 광대하고 세련된 사유지를 높게 쳐줬다. 하지만, ‘중국’이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나라를 찾아 뱃길을 떠난 유럽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사소한 한 가지가 있었고, 이에 페레이라는 머리를 쥐어짰다.

 

우리는 이 나라를 차이나라, 국민을 친스 Chins라고 부르지만, 감옥에서 그들이 한 번도 그런 표현을 쓰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인도에 사는 사람들은 당신네를 친스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너희 나라를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봤다… 그들이 말하길, 고대에는 많은 왕이 있었고, 지금은 한 명 (왕)의 지배를 받지만, 그런데도 왕국마다 원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국은 성 이다 …결론적으로, 이 나라 전체를 타멘 (Tamen, 大明, 대명)이라고 부르고 거주민을 타멘진 (Tamenjin, 大明人, 대명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친스라는 명칭은 없다. 3

 

한마디로,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부르거나 조국을 ‘중국’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 대신에 ‘타멘’이라고 불렀다 ―요즘 식으로 쓰자면 다밍 Da Ming이고 ‘대명 (Great Ming, 大明)’이라 번역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타멘진’― 또는 다밍런 (Da Ming Ren, 大明人), ‘대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페레이라가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민족이나 영토 일부의 구성원이 아닌, 통치하는 왕조의 피지배자라고 본 듯하다. 그들이 유일하게 언급한 장소명은 자신이 살았던 마을이나 성이었지, 국가가 아니었다. 페레이라가 가정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한 국가에 속해 있지 않았다.

몇십 년 후 16세기 말,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의 삶은 페레이라의 삶보다 훨씬 순탄했다. 그들은 상촨다오를 발판으로 삼아, 조금 더 큰 섬 마카오로 무대를 바꿨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희망을 건 선교 활동은 열매를 맺었다. 조정은 이제 예수회를 환영했다. 사제이자 과학자인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는 감옥에 갇히기는커녕 자금성에 최초로 입성한 유럽인이 되었다. 관료들은 일식과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리치의 능력에 매료되었다. 황제는 알현을 거절했지만, 귀빈으로 환영받았고,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땅을 하사받았으며, 조정의 비공식 고문이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마테오 리치의 모습

 

페레이라처럼 리치도 처음에는 똑같은 문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국호의 부재. 하지만 수년간 거주한 후,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붙인 여러 가지 명칭을 들은 적이 없고, 또한 그 존재조차 몰랐는데, 우리 눈엔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한 가문이 다른 가문에게 통치권을 넘겨줄 때마다, 통치권을 넘겨받은 주권자가 새롭게 국호를 부여해야 하는 게 옛날부터 이 나라에 유구하게 내려오는 관습이다.’ 페레이라와 리치는 유럽의 신흥 민족국가와 비교했을 때, 중국은 아주 다른 식으로 정치적인 충성심을 묘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명인’은 통치 왕조의 피지배자였다. ‘중국’에 살거나 ‘중화’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리치는 새로운 사실을 주목한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할 때 붙이는 국호 외에도, 이 나라에는 수 세기 전부터 내려오는 국호가 있고, 그 국호에 다른 명칭들을 결합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나라를 일반적으로 Ciumquo, 또는 Ciumhoa라고 부른다. 앞 단어는 왕국을, 뒤의 단어는 화원을 뜻한다. 두 단어를 조합하면, “중심에 있다”로 번역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Ciumquo를 중국 Zhoug guo으로, Chiumhoa를 중화 Zhong hua로 표기한다. 하지만 리치는 중국 Zhoug guo을 국호가 아니라, 정치적 위계질서의 표현이라고 이해했다. ‘중국인은… 지구가 평평하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상상했다… 주변의 왕국들은…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고려할 만한 가치도 없었다.’ 4 . 이 두 단어는 여전히 쓰인다. 중화 Zhong hwa와 중국 Zhong guo은 ‘영국 연합 왕국’과 ‘영국’, ‘미합중국’과 ‘미국’처럼 한 국가를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일컫는 표현으로, 앞 예시와 같은 방식으로 거의 혼용하여 쓸 수 있다.

‘중국’이라는 표현은 유서가 깊다. 근대에 허난성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기원은 상나라 (商朝, 기원전 1600년~기원전 1000년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세기 후, ‘동주 東周라고 불리는 시대―약 2500년 전 (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에 중국은 베이징 서쪽과 남쪽에 있는 황하 유역 중원 지역, ‘중원 中原’에 세워진 봉건 국가들을 지칭했다. 그 국가들은 통틀어 ‘중심 국가’― 중국 ― 였다. 하지만 일류 중국 지도 제작 전문가로 손꼽히는 리처드 스미스 Richard J . Smith에 따르면, 당시에 이는 사실 상호 연관된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장소이자 문화, 그리고 정치체제를 뜻했다. 5  기원전 5세기경 편찬된 역사서 《전국시대의 전략》 (《전국책 戰國策》)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중국은 지적이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살고, 무수한 생명체와 유용한 도구들이 함께 자리한 곳이다. 현인과 지자 智者들이 가르치고, 자비가 넘치며,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곳이다. 시와 역사, 의식, 음악에 관한 책이 읽히는 곳이다. 서로 다른 사상과 기법이 시도되는 곳, 먼 나라 사람들이 참관하러 오는 곳이다. 심지어 (중국인이 아닌) 만인과 이인 異人도 적절하게 행동하는 곳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오늘날 우리가 ‘중화’ 또는 더 정확히는 ‘한족’이라 부르는 특정한 문화를 가진 곳이었다.

10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후, 12세기 송나라 작가들은 내륙 아시아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자 자국의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중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오래된 아시아의 심장부라는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키면서 또 문화적인 기억을 담아 냈다. 송나라는 몽골에 현재 중원 지역에 해당하는 영토를 뺏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중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자국을 중국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대송국 大宋國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세기 후,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 朱元璋은 자신을 몽골을 물리친 통치자라고 선언하면서, “나는 이제 중국의 통치자로, 천하는 태평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국을 ‘중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는 자신의 왕조의 이름을 따서 ‘대명국 大明國’이라고 국호를 붙였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의 모습

 

‘중국’이라는 명칭이 아주 오래전에 사용되었고 오늘날 중국을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이 3000년, 아니 심지어 5000년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연속적인 국가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다. 하지만 증거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용어들은 오늘날의 의미를 띄기까지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오랜 여정을 거쳤다. 하버드 대학교 중국어과 피터 볼 Peter Bol 교수는 이 용어가 3000년 동안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며, 일관성 있게 발견되는 원칙은 특정한 국가를 지칭하기 위함이 아닌, 중국 안팎의 사람들, 즉 내부인과 이적 夷狄이라 불리는 오랑캐 간의 문화적 차이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6  중국은 국가의 이름으로 쓰려던 게 아니라 이 용어를 통해 국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했다. 몇몇 작가들은 이를 ‘중간국 Middle kingdom’이라고 번역했지만, 호빗이 사는 중간계를 연상시킨다. 그보다 ‘중심 국가 Central state’나 ‘세계의 중심 Centre - of - the - world’으로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하다. 내부의 ‘우리’와 외부의 ‘그들’ 사이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듯이, ‘중국과 ‘중화’라는 용어들은 19세기 후반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부활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구성하여 각각 다른 일화를 연결 짓고, 중국이 영구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역사를 구성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더 복잡하고, 흥미로우며,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과 행보를 잘 설명해 준다.

그렇다면 영문명인 ‘차이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 가장 보편적인 설명은 ‘차이나’라는 명칭이 오늘날 간쑤성에 해당하는, 근대 중국 시베이 지방에서 조그만 봉토를 형성하던 고대 진 왕조 (秦朝, Qin이라 쓰지만 ‘chin’이라고 발음한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진 나라의 국호는 기원전 987년 진 땅에 조그만 영지를 받았다는 데서 기원한다. 7  6세기 동안, 진나라는 황하와 그 지류에 있던 국가들의 ‘전국시대’를 이끌었다. 진나라는 지역을 통치하며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나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마지막 남은 라이벌 국가를 멸망시킬 때까지 그 지역에서 군림한 적이 없었다.

중원 지역과 황하·장강 長江 하류 유역의 대부분을 (비록 잠깐이지만) 손에 넣은 새로운 유형의 통치자로서, 진시황제는 새 왕호 王號를 채택했다. 시황제 始皇帝, ‘최초의 황제’라는 뜻이다.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제는 오늘날 시안 西安 근처에 무덤을 짓고, 진흙으로 빚은 병마용을 둘러 묻었다. 그러나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지 4년 만에, 전 진나라 관료였으나 이제 반란군 지도자가 된 유방 劉邦은 진시황제의 후계자들을 내쫓았다. 왕위를 점령하고 왕조를 창건하여 한 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 진나라는 오늘날 중국의 핵심 영토를 통일한 첫 번째 통치자로 간주된다. 발음이 비슷해서 ‘진’이 ‘차이나’가 되었다고 쉽게 비약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왕조명 진이 영토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인도 출신의 중국학 교수 하라프라사드 레이 Haraprasad Ray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는 진나라가 탄생하기도 전에 중국을 ‘시나 Cina’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쓰였다고 추정되는 힌두교 경전 《바유푸라나 Vayupurana (비슈누 신의 아바타들에 대한 박티〔헌신〕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힌두교 경전으로 《마하푸라나 Mahapurana》들 중 하나이다. - 옮긴이)에서는 ‘시나’ 출신 사람들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기원전 4 세기에 쓰인 《마트샤푸라나 Matsyapurana (비누슈 신의 아바타이자 물고기 형상을 한 마츠야 Matsya에 대한 내용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힌두교 경전으로 《마하푸라나》들 중 하나이다. - 옮긴이)에는 ‘시나’ 사람들은 죽음과 매장 의례를 적절하게 치르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시나’는 또한 각각 기원전 4세기와 기원전 3세기에 쓰인 고대 힌두교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abharata》와 《라마야나 Ramayana》에도 등장한다. 기원전 4세기경 저술된 정치 논문 《아르타샤스트라 Arthashastra (공공 행정과 경제 정책, 군사 전략 보고서 - 옮긴이)도 ‘시나’를 언급하고, 기원전 4세기 의학 서적 《수슈루타 Susruta》는, ‘시나의 천’―시나파타 Cinapatta―가 붕대로 사용하기에 좋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글을 종합해 볼 때 ‘시나’는 진나라 이전에 존재한 것처럼 보이는 히말라야 바로 뒤에 있던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이는 위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수의 증거를 수집한 중국 학자 쑤중샹 (蘇仲湘, 소중상)의 연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영어권 화자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쑤중샹에 따르면 ‘시나’의 정확한 기원은 진나라보다 훨씬 전에 존재했던 국가 ‘형 (荆, Jing)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나라는 중국 문헌에서 초 (楚, Chu)나라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수 세기에 걸쳐 발음이 바뀌고 지금 ‘형’과 ‘시나’가 다소 달라 보여서 그렇지, 발음 간의 관계는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형/초나라의 중심은 오늘날의 후베이성으로, 묘족 苗族이 살았다. 이후 한 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글에서 묘족을 ‘오랑캐’인 외부자 (이인)라 묘사한 걸 볼 수 있다. 8

호주 출신 학자 제프 웨이드는 언어를 살짝 바꿔 보면, ‘시나’라는 말이 다른 민족에서 기원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윈난성 시난 지역 산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오늘날의 중국어로는 ‘예랑 夜郎’이라 부른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서사시 모음을 살펴보면, 이들은 자신을 ‘지나 Zhina’라 부른다. 제프 웨이드는 ‘지나’가 산스크리트어 ‘시나’와 음운학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윈난성에 해당하는, 이 집단의 전통적인 영역은 중국과 인도 사이의 육로 무역로 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동쪽 산맥을 넘고 이 지역을 거쳐 인도에 도착한 물건들은 ‘시나’에서 왔다고 자연스레 회자되었을 것이다.

위 두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있지만, 아직 확고한 결론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이 중 하나가 진실이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서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중국 China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인 ‘중국의’ 심장부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장소 밖에서 파생되었다 ―‘중국’ 밖에서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사람 대다수는 민족적으로 ‘중국인’이 아니었다. 현재 ‘중국인’이라는 단어가 정의하는 바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형/초나라에는 묘족이 살았고, 예랑/지나 국가에는 이인이 살았다. 심지어 ‘시나 Cina’는 애초부터 ‘중국’ 안에 있던 게 전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설명을 선호하든, 분명한 것은 20세기 이전 그 어떤 ‘중국’ 국가도 자국의 영토를 ‘차이나 China’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지인들만이 사용하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상하면서 ‘차이나’라는 명칭은 멀리 퍼져 나갔다. 서기 2세기 무렵, 그리스-로마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 Claudios Ptolemaeos가 쓴 글에는 Sinæ와 Thinae가 등장한다. 비록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이 책 전체가 비유하는 바와 같이, 차이나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의미를 획득했지, 내부에서 의미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유럽에서 차이나는 비단이 나고 경이로운, 신화적인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차이나’라고 불리는 곳이 어떤지 전혀 모르면서도 그 모습을 상상했다. 유럽인들은 동양의 다른 장소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캐세이 Cathay는 비단이 나고 경이로운 장소이지만 차이나보다 분명히 더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캐세이’는 오늘날의 중국 북부, 몽골, 러시아 동부에 걸쳐 있던 요 나라를 설립한 내륙 아시아 ‘거란 Khitan’에서 유래했다. 육로로 ‘캐세이’에 도달할 수 있는 한편, ‘차이나’는 해로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사실 모두 ‘동아시아의 심장부’ 중국을 일컫는다.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습

 

1500년대부터 차이나/캐세이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의 동양 원정의 목적지가 되었다. 하지만 갈레오테 페레이라 등의 탐험가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상상했던 모습의 ‘차이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3세기 후, 유럽인들의 국가에 대한 관념, 즉 고대에 기원을 두고 연속적으로 존재하던 국가라는 아이디어는 ‘차이나’ 사회의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채택된다. 그들은 그렇게 차이나가 되기로 했다,

 

1689년 여름, 러시아 차르국 두 명의 차르, 표트르 Pyotr 1세와 이반 Ivan 5세는 시베리아 네르차강 연안에서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 康熙帝가 보낸 사절단과 함께 자리했다. 러시안들은 의자에 앉았던 반면, 청나라 사절단은 방석을 선호했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5000킬로미터,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1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특별하게 설치된 텐트에서, 누가 러시아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지 논쟁을 벌였다. 청 왕조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자신들이 ‘중국’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통치자였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 사건 (네르친스크 회담)을 가끔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잘못된 것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 대신, 외국인들이 중국을 발명했다는 증거가 더 두드러질 뿐이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모습

 

수십 년 동안 러시아의 개척자들은 아무르강 (러시아·중국·몽골·북한의 유역에 걸쳐 있는 강으로 헤이룽강, 흑룡강이라고도 한다. - 옮긴이)과 그 지류를 따라 점점 더 먼 곳까지 탐험하고 정착했다. 청나라가 합법적으로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역에 닿으면서 말이다. 청나라는 저항했고 그 결과, 1680년대에 일련의 갈등이 생겼다. 1680년대 말, 청나라는 침략을 멈췄고, 두 국가는 평화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로 전갈을 공유한 후, 러시아가 최근에 정복한 네르친스크의 성 밖에서 러시아가 회담을 열기로 동의했다.

청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오늘날 중국 둥베이 지방에서 오고 일종의 시베리아어인 만주어를 구사하는 만주족이었다. 1644년, 만주족은 추운 고향을 떠나 쓰러져 가기 일보 직전인 명나라를 점령했다. 중국 밖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예전의 명 영토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전임자들의 몇 가지 통치 기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하지만 명나라를 계승하면서도, 만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만주족은 미국 역사학자 파멜라 크로슬리가 ‘동시 통치 Simultaneous Ruling’라고 명명한, 내륙 아시아 스타일로 계속해서 통치했다. 9  문화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바에 따라, ‘대국’의 각 지역은 다르게 통치되었다. 그런데도 그 핵심에는 만주어와 문자가 공식어와 공식 문자로 남아 있었고, 새로운 엘리트들은 승마, 활쏘기, 사냥, 의례, 기도,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 등 만주족의 전통을 보존하려 했다. 더 중요한 점은 만주족이 정복한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주족의 체제―깃발군 (군사 행정 조직으로, 일반적으로 8개의 깃발군으로 되어 있어 팔기 八旗라 부른다. 팔기는 만주 여진족의 수렵 조직에서 비롯되어 청나라 사회생활과 군사 조직의 기본 제도를 형성했다. - 옮긴이)이라 알려져 있다 ―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은 만주 ‘대국’의 성 이 되었다.

강희제는 네르친스크 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신의 친척 두 명, 색액도 (索額圖, 호는 우암 愚庵. 색중당 索中堂, 색상 索相, 색우암 등의 별칭으로도 불림. 강희제의 통치 기간에 권신으로서 활동하였다. - 옮긴이)와 동국강 (佟國綱, 강희제의 외숙으로서 만주 양황기 鑲黃旗에 속한 인물이다. 내각 내신으로서 일등공 一等公 작위를 세습했고, 강희 27년〔1688〕에 색액도를 따라가서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참여했다. - 옮긴이)을 보냈다. 둘 다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러시아 차르국은 표도르 알렉세예비치 골로빈 Fyodor Alexeyevich Golovin 백작을 대표로 보냈지만, 만주어를 몰랐다. 협상의 진행될 수 있었던, 그리고 협상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건, 두 유럽 예수회 사제들의 공이 컸다. 두 사제는 프랑스 출신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Jean - François Gerbillon, 포르투갈 출신의 또 다른 페레이라, 토마스 페레이라 Thomas Pereira였다. 조정은 만주족 손에 넘어갔지만, 예수회는 계속해서 조정에 특별히 출입할 수 있었다. 1689년까지, 토마스 페레이라는 16년 동안 청나라 조정에 소속되어 있었다. 서양의 수학을 설명하는 교과서를 만주어로 저술했을 정도니,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

토마스 페레이라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을 수 없자 그 대신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열일곱 살에 예수회에 합류한 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수학과 음악 과목 둘 다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었다. 같이 공부한 사람 중에는 최초의 마카오 태생 예수회 신부 정마낙 鄭瑪諾이 있었다. 아마도 정마낙에게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페레이라는 스무 살이 되던 해 동쪽으로 항해를 했다. 선교단 중 막내로 아시아로 떠났다. 인도 고아와 마카오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한 후 베이징에 파견되었고, 1673년 초에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베이징에 도착한 이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11

예수회는 젊은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줘야 했다. 그래서 시계, 과학 기구, 파이프 오르간을 만드는 일을 페레이라에게 맡겼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가장 화려했던 건 새장 속 새와 10개의 종 세트로, 새가 물을 마시거나 모이 상자를 열 때마다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어느 정도 후에는 대중들의 반응도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 기술 덕분에 페레이라는 강희제를 잘 알고 지냈던 것 같다. 1680년 그는 황제의 방에서 황제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고 예수회 고위 성직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1688년, 페레이라는 예수회에 ‘조정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비밀은 없다’라고 적었다. 12  페레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강희제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예수회의 지식을 높이 샀다. 그래서 강희제는 토마스 페레이라와 갈레오테 페레이라를 네르친스크 회담에 보내 러시아인들과 자리하게 했다.

 

토마스 페레이라의 흉상

 

청나라 대표단이 협상 중에 무언가를 말하고자 할 때면 예수회 사제들에게 만주어로 얘기했다. 예수회 사제들은 만주어를 라틴어로 번역해 폴란드 통역사인 안드레이 벨로보츠키 Andrei Belobotski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벨로보츠키는 골로빈을 위해 라틴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두 사제는 대화가 어떻게 오갔는지 세세하게 기록을 남겼고 언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통역한 건 분명하다. 또한, 두 사제는 서부 유럽과 동아시아의 법과 정부, 정치적 권위의 본질에 관한 개념을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토마스 페레이라는 회고록에서, 러시아인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문명인이라고 청나라를 설득시켜야 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그는 청나라가 자기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향해 다소 분노를 표한다. ‘중국은 초창기부터 조공을 바치는 국가의 국민 외에는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마스 페레이라는 일기장에 적어 나갔다. ‘세계를 바라보는 무신경하고 무지한 시각으로 인해, 타타르인 (즉, 청나라인)은 중국인들만큼이나 자부심을 품고 타국들을 주변국들과 마찬가지의 유목민족 수준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소위 ‘천하 (天下, 말 그대로 하늘 아래라는 뜻으로, 공통된 가치관과 통일된 질서가 정립되고 정치 이상이 실현되는 이념적 세계로 정의된다. - 옮긴이)’― 즉, ‘하늘 아래’ 모든 세상 만물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마치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13  페레이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이 유럽인들이 ‘국제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개념을 청나라에 도입시켰다고 한다 ― 국가를 국경과 주권을 가진 영토의 주인으로 보는 관점으로, 다른 국가들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비교적 참신한 견해였다. 네르차강 근처에서 회담이 열리기 딱 40년 전에, 1648년 30년 전쟁 (유럽에서 로마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 - 옮긴이)을 종결지은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구체화한 개념이었다.

러시아 차르국의 지도자들은 이 ‘베스트팔렌조약 (베스트팔렌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회의를 통해 나온 것으로,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중부 유럽에 세웠다. 국제법의 출발점이라고도 한다. - 옮긴이)’에 담긴 세계관을 합리적으로 이해했다. 예수회도 이 세계관을 이해했다 (비록 교황이 인정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청나라가 이 관점을 충분히 받아들여 러시아 차르국 사절단과 정식 국경 협정에 서명할 수 있도록 설득시키는 건 예수회의 몫이었다. 양측이 말할 때마다 세 언어를 통역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고 조약이 불발될 뻔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1689년 9월 6일, 끝내 협상은 종결되었고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였다. 의미심장하게도 중국어로 된 조약문을 쓰지 않았다. 예수회와 벨로보츠키는 최종 조약문을 라틴어로 남기기로 동의했으며, 각 장에 러시아어와 만주어―청나라의 공식어―로 번역본을 달았다. 중국어 번역문은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사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들에게 조약문을 기밀로 유지하려고 한 듯하다.

조약문 라틴어본에서는 청나라를 ‘시니치 제국 Imperii Sinici’이라 지칭했다. 만주어본에서는 ‘둘림바이 구룬’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중심 국가’로 번역될 수 있다. 명백하게도 이는 중국에 해당하는 만주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유럽 예수회가 청나라의 세계관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는 청 조정이 다른 명칭, 즉 천하를 사용했다고 밝혔지만 사실 청나라가 ‘천하에 있는 만물’을 다스린다는 주장이 러시아가 따른다고 주장하는 ‘만국공법 萬國公法’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유로 조약문을 중국 대중에게 비밀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황제가 국경 협정에 서명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결국 황제는 ‘천하의 만물’―천하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중국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정치 철학은 파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후 네르친스크조약문은 중국이 외세에 자국을 ‘중국’이라고 지칭한 최초의 문서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사건의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오해할 소지가 있다. 회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설명은 공식 협상에서 사용한 언어가 중국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협상 임무에 소속된 중국인 관료가 없었고 (그래서 중국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청나라 사절들이 만주어나 몽골어를 썼다고 페레이라가 명백히 밝혔기 때문이다. 네르친스크조약문은 신생 ‘중국’이 ‘성숙했다는 걸’ 보여 주는 문서라고 보기보다는, 유럽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예수회가 한 아시아 국가를 소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르비용과 페레이라는 단순히 언어만 번역한 게 아니라, 정치 질서와 국가 본질의 개념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청과 러시아 사이의 평화라는 더 큰 이익을 위해, 대청국의 본질을 유럽 외교 질서에 끼워 맞춘 것이다. 후대의 민족주의자 역사가들이 뭐라 썼던, 네르친스크조약은 ‘중국의’ 국가가 자기 자신을 최초로 중국이라고 부른 순간은 아니었다. 예수회 사제들이 동서양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국가를 영토가 아닌 통치자를 향한 충성에 따라 정의하는, 꽤 다른 지역적 질서를 ‘만국공법’에 적응시키는 순간이었다.

강희제는 북부 국경 지역에 찾아온 평화를 감사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조정이 네르친스크조약 공표를 위해 만국공법을 암묵적으로 찬성하는 것에 썩 열광하진 않았다. 예수회 신도이자 조지타운 대학교의 20세기 중국학자 조셉 세베스 Joseph Sebes는 그 당시 어떤 중국어 자료에도 네르친스크조약이 글로 남겨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예일 대학교의 피터 퍼듀 Peter C . Perdue 중국사 교수는 《강희실록 康熙實錄 (강희제 말기에 편찬된, 강희제의 일상을 기록한 책 - 옮긴이)에 조약문 사본이 실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된 지 약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은 듯싶다. 19세기 말, 청나라가 러시아와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조약문 원문을 근거로 들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인원은 적을지라도,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청나라 궁정에서 예수회가 행사한 영향력은 매우 컸다. 때때로 사제들은 베이징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토마스 페레이라는 베이징에서 32년을 살았다) 관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했다. 사제들은 예수회와 가톨릭교회 상부에 상세한 보고서를 보냈고, 보고서를 통해 유럽 사람들은 동양의 신비한 나라에 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 ‘중국’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지도와 책으로 유럽 대중에 소개한 건 기본적으로 예수회 사제들이다. 갈레오테와 토마스 이후, 두 페레이라의 글에서부터 진짜 ‘중국’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와 협상 시 예수회가 ‘중국’을 대청국을 나타내는 칭호로 선택한 것은 한 명칭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 훨씬 그 이상이었다. 예수회가 시작한 과정을 통해 중국은 자국을 새롭게 소개하고 나아가 자국을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은 수천 년간 쓰였지만, 청 말기가 돼서야 국제 관계에서 흔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가와시마 신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전반까지 작성된 28개의 외교문서에서만 청과 중국이라는 표현을 섞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19세기 후반에 더 널리 쓰였다. 예를 들면, 1861년 러시아, 1880년 미국과 맺은 조약들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1861년 중국-페루 무역협정의 표현을 보면 중국을 ‘대청국 大淸國’이라고만 언급한다. 아리프 디를릭은 협정에서 정부의 행동을 가리킬 때 청나라 사절단은 ‘대청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나의 영토를 가리킬 때는 ‘중국’을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14

하지만 미국의 지리학자 리처드 스미스는 역사적으로 중국이 일관성이 있게 사용된 이름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확실한 형태가 없는 영토를 설명하기 위해 고문서에서 사용된 용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화 中華―‘꽃이 피는 중심’, 신주 神州―‘영적인 지역’, 구주 九州―‘아홉 개의 지역’, 중토 中土―‘중앙의 땅’, 그리고 천하 天下―‘하늘 아래의 만물’ 등의 용어도 있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용어 간의 관계와 고문서에서 정확한 의미의 차이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20세기 중국 역사학자 첸 리안카이 (陳連開, 진연개)는 중화가 3~4세기에 최초로 사용되었고, 이는 중국과 화하 華夏―금 나라가 통치했던 ‘문명화된’ 지역을 설명하는 두 가지 표현―가 합쳐진 것이라고 피력한다. 첸은 중국 Zhong guo과 중화 Zhong hwa라는 용어가 그때부터 호환하여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리디아 리우 Lydia H . Liu 중국어학과 교수는 ‘중국’ 안에 거주하는 ‘뛰어나고’ ‘문명화된’ 사람들과 중국 밖의 ‘오랑캐’, 즉 이  또는 이적 夷狄을 구분하기 위해 화 와 하 라는 용어를 모두 사용했다고 한다. 리우는 화 와 하 라는 단어가 정체성의 ‘본질’을 망라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및 함축된 의미는 수천 년에 걸쳐 변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15

일대일로 국제 협력 고위급 포럼 등의 행사에서 현대 중국이 보여 주는 자아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의 상상력과 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주입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와 같은 식민 도시의 사상가들과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 간의 논의를 걸쳐 창조되어 나온 것이 마치 중국 본토에서 잉태한 민족국가의 구상에서 나온 척 굴지만, 실제로는 서양의 ‘중국’에 대한 관념에서 나온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체화되었다는 걸 우리는 이 책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새로운 국가가 개혁된 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하는지 또는 혁명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단일민족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두 가지 쟁점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장더이 (張德彛, 장덕이)는 19세기 후반 대청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신민 최초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고 거주했다. 만주 조정 내 개혁파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에 들어와 외세의 압박을 가하는 신규 파견 사절들과 협력을 도모하기 시작할 때였다. 1862년, 장덕이는 15세의 나이로 베이징 소재 동문관 同文館―통번역 대학 ― 에 입학했다. 장덕이는 최초로 동문관에 입학한 열 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개혁파가 설립한 동문관은 ‘청나라 해관 (해외 무역을 담당하는 세관 - 옮긴이)’의 지원을 받아 조정과 외세가 공동으로 운영했다.

해관은 아편전쟁이 낳은 또 다른 결과물이었다. 숱한 피를 흘린 태평천국의 난과 유럽 열강의 일제 공격, 그리고 청조 내부의 쿠데타 등 혼돈 속에서 탄생한 기관으로, 아리송한 혼합 조직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자 한스 반 드 방 Hans van de Ven은 그 기원을 1854년 영국과 청나라 간에 체결한, 상하이를 국제적으로 ‘할양’하는 비공식 협정에서 찾는다. 1861년, 베이징 외곽에 있는 황제의 여름 별장용 궁전 (원명원 圓明園)이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파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은 관공서가 되었다. 해관은 명목상으로 황제의 권한 아래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영국 관리들이 운영했다. 16  그래서 업무 운영을 위한 통역사가 필요했고, 통번역 대학 (동문관)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 대학은 단순히 문서를 번역하는 것 이외에도 서구의 사상이 청나라 엘리트 사회로 유입되는 결정적인 관문이 되었다.

장덕이는 통번역 대학에서 3년간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1866 년, 조정은 유럽의 실상 조사를 위한 사절단을 꾸렸고, 장덕이가 후보자였다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그 후 1868년에는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되어 길게 체류했고,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제2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 - 옮긴이)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로 갔다. 그는 여행기를 쓰며 ―갈레오테 페레이라와 토마스 페레이라가 300년 전에 그랬듯이― ‘기이한 복장과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받은 인상을 기록했다. 17  만난 사람들 대부분에게 영감을 받았지만, 조국을 잘못된 이름으로 부르는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답답했다. ‘수십 년간 동서양이 외교 관계를 맺고 교역을 하니, (그들은) 우리나라가 대청국 또는 중화 (꽃이 피는 중심)라고 불리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차이나, 자이나 Zhaina, 키나 Qina, 시인 Shiyin, 지나 Zhina, 키타 Qita 등으로 부른다.’ 장덕이는 불평했다. ‘4000 년이 넘는 역사에서 중국은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무슨 근거로 서양인들이 그렇게 부르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18  장덕이에게는 통치하고 있는 왕조명을 부르는 게 맞았고, 한 영토를 묘사해서는 안 됐다.

장덕이는 서양의 교섭 담당자들을 설득시키려고 1871년 5월에 이 글을 썼지만, 서양인들을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그 이후로 수십 년간,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도 다른 의견이 우세해졌다. 1887 년, 외교관 황준헌 黃遵憲은 ‘제대로 된 국명’이 없다고 불평했다. 황준헌은 1877년 일본에 새로 부임한 청나라 공사의 참사관으로 파견되어, 일본이 개항하고 근대화에 시동을 거는 모습을 5년간 지켜보았다. 19  급격한 생활수준 향상에 감명을 받은 그는 본국에 있는 동료 외교관들에게 실상을 알려 주기 위해 자신이 목격한 일본의 변화를 긴 글로 풀어냈다. 하지만 다른 외교관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황준헌의 글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에 승리한 후, 일본에 관해 중국어로 기록한 가장 중요한 정보로 떠올랐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모습

 

황준헌의 책은 일본의 근대화를 찬양하는 글로 시작하지 않는다. 황준헌은 조국을 비판했다. 국호의 부재를 지적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영국이나 프랑스 등 전 세계 여러 국가는 자신만의 국호를 자랑한다. 중국만 국호가 없다… 여러 언어로 우리나라는 ‘차이나’라고 번역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최근 외국인과 대화할 때 우리는 ‘중화 (가운데서 빛나다)’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웃 국가들은 세상 모든 국가가 스스로를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비난했다. 게다가 내 나라가 ‘빛나고’ 다른 국가를 ‘야만적’으로 취급하는 건 타국을 비하하기 위해 자국의 영광을 높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20

 

1897년, 황준헌은 일본, 샌프란시스코, 런던, 싱가포르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했다. 그 후 후난성 ‘안찰사 按察使’로 임명되었다. 황준헌은 직위― 공식적으로는 지방 관료를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 를 이용하여 청나라의 개혁을 지지했다. 그는 성도 省都 창사 (長沙, 장사. 후난성의 성도 - 옮긴이)에 ‘시무학당 時務學堂’이라는 학교를 건립하고 당대의 가장 유명한 개혁가였던 량치차오 (梁啓超, 양계초)를 대표 교수로 초청하였다. 전년도에 황준헌과 량치차오는 《강학보 強學報》 ―‘학습에 힘쓰는 신문’― 를 공동 창간 (또 다른 개혁가 담사동 譚嗣同도 함께하였다)하였고, 이 학보는 나중에 특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21

황준헌과 량치차오는 헌법 개혁이 필요하고, ‘적절한’ 국호를 갖춰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무엇을 국호로 정할지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황준헌은 ‘중앙’을 뜻하는 ‘중 (中, Zhong)’을 좋아하지 않았다. 1887년에는 중국보다 더 위대한 뜻을 담은 화하 華夏가 국호로 적절하다는 글을 썼다. 말 그대로 번역해 보면 ‘번영하는 위대함’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오래된 명칭, ‘화 ’와 ‘하 ’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화하가 국가 이름보다 민족을 일컫는 데 적절하다는 다른 이들의 주장 속에 황준헌의 의견은 대체로 묻혔다.

 

량치차오의 모습

 

새로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계속해서 근대화에 압박을 가했다. 량치차오의 멘토이자, 급진파 학자 캉요우웨이 (康有为, 강유위)와 함께 헌법 개혁을 위해 어린 광서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1898년, 광서제에게 압력을 가한 결과, 그는 교육과 군사, 공무 조직의 온건한 변화를 담은 40개의 칙령을 공포했다. 극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지만, 조정 보수파의 걱정은 하늘을 찔렀다. 103일 후,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 (권좌 뒤의 실세였다)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광서제는 새로운 칙령을 포기해야 했다. 광서제는 그 후 10년간 계속해서 왕위를 유지했으나 사실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서태후가 광서제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백일유신 (캉요우웨이를 비롯한 변법파는 9월 21일부터 103일 동안 변법 제정과 국회 개설이라는 제도 개혁과 경사대학당 설립 등 인재 양성을 중심으로 한 갖가지 개혁안을 상유 上諭를 통해 발표했다. 이를 무술변법 또는 백일유신이라고 한다. - 옮긴이)을 추진한 무술 6군자는 처형을 당한 한편, 캉요우웨이와 량치차오, 황준헌은 몸을 피했다. 황준헌은 남부에 있는 고향 (광둥성)으로 피신했고, 정계에서 물러나 시를 썼다. 처형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캉요우웨이와 량치차오는 더 멀리 일본으로 도망친 후 계속해서 활동했다.

 

캉요우웨이의 모습

 

오늘날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네온 불빛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20세기의 전환기, 오늘날의 관광 명소인 그곳에서는 체제 전복을 꿈꾸는 중국인들이 북적거리며 모였다. 량치차오는 그곳을 기점으로 두고, 일본이 이미 걸어간 길, 즉 조국을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글을 쓰고 신문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근대 민족국가는 국호가 필요했다. 1901년에 쓰여 널리 읽힌 글 ‘<중국 약점의 근원 (중국적약소원론 中國積弱溯源論)>’에서, 량치차오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시나” 또는 “차이나”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르다’라고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며 30년 전에 활동한 장덕이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장덕이와는 달리, 량치차오는 특히 ‘대명국’ 또는 ‘대청국’ 같이 통치 왕조의 이름을 따서 국호를 붙이는 전통적인 명명법에 불만이 있었다. 중국 국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내포할까 두려웠다. 호주 출신의 중국학자 존 피츠제럴드 John Fitzgerald에 따르면, 량치차오에게 국호가 없다는 건 중국인의 문화적·지적 미숙함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량치차오는 이를 ‘모든 이의 머릿속에 박힌’ 개념적인 오류라고 불렀다. 22

량치차오가 선택한 단어는 사실 그가 쓴 글 제목 (<중국적약소원론>)에 등장하는 중국이었다. 그는 ‘중심 국가’라는 뜻의 중국에서 역사관을 차용했는데, 여기서 ‘중심’이란 오래된 계급주의적 우주론의 관점에서 ‘세계의 중앙’을 의미했고, 량치차오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중국은 더 이상 지역적 정치 제도를 대표하지 않는 단순 명칭이 되었지만, 수 세기 동안 사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중국이라는 개념은 외국인이 쓰는 ‘차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