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책 제목부터 쌈박하다. 분명히 나이드신분이 쓰셨을텐데, 책 제목은 젊게 뽑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게 재미있게 사는걸까 ? 이런생각으로 한번 선택해봤다. 내가 젊을때 정신과 의사이신 이시형 선생님이 쓰신 "베짱으로 삽시다 " 를 읽고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적이 있다. 내가 청년기에 성격이 소심한편이라 다른사람에게 싫은소리 못하고, 거절도 못하고...참 답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그렇게 살아가야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도 나고,나도 이제 나이든사람인지라...내용이 궁금했다.
학생시위전력으로 취업하기 힘들것같아서, 정신국립병원에 편지를 썼다는 내용, 보육원 자원봉사, 히말라야 등산, 그리고 시낭송회, 그리고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 가족아카데미 단체가 있다고도 하시고.. 이렇게만 보아도 상당하게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시면서 사신듯하다. 그런데 이런일들을 다양하게 할수있었던것은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하는 일이어서 즐기면서 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시는분들이 많지는 않았을듯하다. 그만큼 다양한것들을 수용하며 사실수있는 능력이 크신듯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능이 눞은 사람들은 다양한것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일수있는 능력이 크다. 그래서 보통사람보다 훨씬 다양한 분야를 수용해가며 살아가는 여력이 있는듯하다. 나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다양하게 살아보지는 못한듯하다.
이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부분은 3대가 같이 사는 집을 지어서, 규칙을 정해놓고, 며느리들에게도 거절하는법을 먼저 가르쳤다는... 같은 건물에 살아도 방문하려면 먼저 예약을 해야한다는점...대화는 전화나 문자로 한다는점...이런면은 상당히 현시대를 깨어나서 사시는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한국의 수직적인 문화안에서 이런규칙을 만들어서 삼대가 서로 불편함에도 말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칙을 만들었다는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배려를 받아야하고,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보통 노인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책은 이렇게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가신 분도 계시는구나.... 그런생각이 들고,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는 내용에 감탄할뿐이다. 나도 그런사람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은이이근후
1950년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 생활을 한 탓에 취직이 어려워져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취직 후에도 빚을 갚고 자식 넷을 낳고 키우느라 젊은 시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절망하는 법이 없었다.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과 전문의이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퇴임 후에는 아내와 함께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그리고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시 학생이 되어 배움의 길에 들어선 그는 그저 웃으며 ‘일흔 넘어 한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라고 말한다. 40년 넘게 네팔 의료 봉사를 하고, 56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것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사람들은 그의 몸 상태를 알고 나면 깜짝 놀란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지금은 오른쪽 눈도 희미한 실루엣만 보인다. 이 책을 처음 펴냈던 10년 전에 이미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던 그의 몸에 이제는 몇 가지 병이 추가되어 걸음은 더 느려지고 말도 어눌해졌다. 하지만 유쾌하게 인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여전하다.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졌지만, 매일 아침을 맞는 신비로움은 여전히 새롭고 감사할 일은 더 늘었다고 웃음 지을 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폐쇄적인 정신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정신 질환 치료법으로 사이코드라마를 도입했으며,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정신의학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지만, 필요한 일이고 하고 싶어 했을 뿐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또한 한 여자의 남편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오면서 절대 자식 인생에 간섭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다. 현재 결혼한 자녀 부부와 네 명의 손주들까지 모두 삼 대 열세 명이 한집에 모여 사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는데, 그 화목함의 비결은 딱 하나다.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식구 전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칠 정도로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을 지켜오고 있다. 그랬더니 오히려 가족 간 허물없는 소통이 이루어졌다며 즐거워한다.
아흔을 앞둔 지금도 그는 하루하루 사는 일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않지만 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청탁 원고를 쓰고 책을 읽고 제자들에게 안부 메일을 보낸다.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리운 이들에게 연락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없는 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앞만 보며 달렸던 젊은 시절에는 몰랐던 여유로운 즐거움이다.
40여 년간 23여 종의 책을 썼고 그중 2013년에 출간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화두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며 40만 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유쾌한 그의 노년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 즈음 그의 당부가 마음속에 들려올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특별한 것은 아니며 “누구든 재미있게 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인생은 온통 재미있는 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엮은이 김선경
출판 에디터. 잡지와 단행본을 두루 만들었다. 직접 쓴 책으로는 2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가 있으며 세계적인 심리학자 타라 브랙이 쓴 《자기 돌봄》에 엮은이로 참여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출간 10주년 서문 |
각자의 자리에서 또 열심히
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남녘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좀 되었는데, 그 사이 서울에도 산수유, 벚꽃, 개나리,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다지요? 이상 기온 탓이라고도 하는데, 슬프지만 올해는 봄꽃 구경을 하지 못할 듯합니다.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건 20여 년 전 네팔 히말라야에 갔을 때입니다. 오른쪽 눈도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그간 잘 버텨주다 지난해부터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지금은 두루뭉술한 실루엣으로 움직임과 사물을 구분하는 정도입니다. 아, 그러나 코는 멀쩡합니다. 곁을 지켜주는 요양 보호사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내가 즐겨 찾던 삼청공원에 만발해 있을 꽃나무 아래로 가서 향기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겠습니다.
10년 전,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을 넘긴 78세에 이 책을 펴내면서 “나는 한쪽 눈이 완전히 안 보이고,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간다”고 밝혔지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와! 눈 떴다!” 하면서 감탄한다고도 했지요. 지금은 몇 가지 병이 추가되어 걸음은 느려지고 말도 어눌해졌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졌지만, 매일 아침을 맞는 신비로움은 여전히 새롭고 감사할 일은 더 늘었습니다.
몇 년 전 주차장 계단에서 굴러 머리를 다쳤습니다. 목덜미로 흐르는 액체를 손가락으로 짚어보니 두개골이 깨졌구나 싶더군요, ‘하, 이근후 인생도 여기서 끝이구나.’ 구급차에 누워 아득해지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예감하던 중, 불쑥 열흘 뒤 마감인 원고가 생각났습니다. ‘이왕지사 열흘 뒤에나 굴러떨어지면 좋았을 것을…….’ 설핏 웃음도 났습니다. 과다출혈로 죽을 위기를 넘기고 40일 만에 회복했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사고가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든여덟인 지금은 거의 날마다 죽음을 떠올립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구나, 그러면 하루가 절실해집니다. 뿌연 거울 앞에서 더듬대며 하는 면도, 아내와 마주 앉아 먹는 식사, 오늘 외우는 시 한 편, 텔레비전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란한 뉴스, 한 모금의 차, 들이 내쉬는 한 번의 숨……,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모든 ‘살아있음’이 기껍고 소중합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다’였습니다. 편집자가 ‘죽을 때까지’라는 단어를 넣자고 했을 때는 솔직히 저어했습니다. 의사로서의 경험은 물론 어머니, 친구, 지인 등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지만, 정작 나와 죽음을 직접 연결하는 건 두려웠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게 계기가 되어 죽음이 빨리 찾아오면 어쩌나 싶은 비이성적인 생각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니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살라는 맥락에 묘하게 설득되더군요.
제목 그대로 나는 지난 10년 동안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니,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책 덕분에 나의 자녀 넷과 손주들과도 친밀해졌고, 의대를 다니던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던 동기와 연락이 다시 닿아 미국에서 조우하기도 했습니다. 고위층 인사들의 초대로 의전을 받으며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지요. 가장 큰 기쁨은 다양한 매체에서 받은 원고 청탁과 강연 요청이었습니다. 정년을 맞아 병원 문을 닫고 막연한 상실감을 느끼던 그즈음,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나의 환자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만난 것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대부분 수락했습니다. 원고료를 주지 않아도 글을 썼고, 단 한 명의 청중뿐이어도 강연을 했습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만 신청자가 한 명이라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 문화센터 담당자의 말에, 주최 측만 괜찮다면 강연을 진행하고 싶다 했습니다. 강연 당일, 객석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청중에게 무대 위로 올라올 것을 요청했고 우리는 마주 앉아 인생 이야기를 실컷 했습니다. 헤아려 보니 1년에 100여 회, 지금까지 1천 번에 가까운 강연을 했고 그 사이 16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참, 놀랍지요? 다시 말하지만, 모두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가 씨앗이 된 결과입니다.
이 책의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과연 ‘시시콜콜한 내 인생 이야기를 읽을 이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독자 자신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 부모, 이웃의 이야기라고 공감한 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진료실에서 환자들이 털어놓는 문제는 실상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다 비슷한 삶의 여정 속에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의사에게 우울과 불면, 무기력, 불안, 분노, 공포 등을 호소합니다. 대개 심리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육체적인 증상으로 발현됩니다. 우선 적절한 약으로 증상을 누그러지도록 한 다음,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주는 것이 의사의 역할입니다. 환자 자신이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자기 객관화란, 내가 타인을 평가하듯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환자만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는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자기 삶을 객관화하는 작은 거울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나는 소위 ‘오래된’ 사람입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정치적 혼란, 가난을 겪었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기를 지나 의사라는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생활인으로 네 아이를 키웠습니다.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자는 결심을 세우고 소신껏 이런저런 봉사를 해왔습니다. 그 여정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 나름대로 솔직한 자기 고백과 고민들, 이를 해결하려는 안간힘, 시행착오들을 담았다고 자평합니다만, 독자들은 용케도 자신들의 고민을 발견하고 그 해결점을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어 갔습니다. 나로서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네’ 하는 작은 위로를 드린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데, 많은 분들의 칭찬과 격려 앞에 나는 대단한 무엇을 이룬 듯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드리려고 책을 샀습니다. 부모님도 선생님처럼 사셨으면 하고요.” “곧 은퇴하는데 노후에 도움이 될까 해서 책을 구매했어요.” 하고 독자들에게 상찬을 받을 때마다 당부하곤 합니다. 이 책은 이근후라는 한 개인의 삶일 뿐 정형화된 정답으로 삼지 말라고요. 초보 의사 시절, 십 대 청소년을 진료하며 한참 떠들어댔더니 나가면서 한마디 던지더군요. “선생님이 다 옳은 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내 이야기는 참고서로 삼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자기만의 깨달음으로 삶을 만들어가라는 것이 나의 진심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인공지능, 4차산업 등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오래된 사람’인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그 변화를 체감하곤 하는데, 볼일을 보고 물 내리는 법이 생소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당황한 적이 여러 번입니다. 종종 강연장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 공중화장실 에피소드를 농담 삼아 들려주면서 ‘스마트SMART’ 원칙을 일상에서 실천해 볼 것을 권합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첫째 S. ‘심플리파잉 Simplifying, 삶을 단순화시켜라.’ 한마디로 사고의 단순화, 이거저거 너무 많이 재고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합니다. 지나간 일에 집착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증상이 심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치매에 걸렸을 때 그의 아내 낸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받아들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요.” 그녀는 남편이 왜 치매에 걸렸는지, 얼마나 아플지, 간병하는 자신은 또 얼마나 힘들지 따위의 걱정을 하는 대신 오늘 하루 남편과 자신을 위해 할 일을 해나갔습니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는 피하려 하거나 덮어두었을 때 더 깊어지고 악화되기 쉽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일들에 온갖 경우의 수를 애써 만들어 따지기보다 당장 지금, 오늘 이 순간 할 일에 집중하십시오.
둘째 M, ‘무빙 Moving, 움직여라.’ 우리 몸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노년기뿐 아니라 몸의 일부처럼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요즘 젊은이들도 몸 쓰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격한 운동이 아니더라도 자주, 멀리 걷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 우리 뇌는 어른이 되면 성장을 멈춘다고 알고 있지만, 뇌는 죽을 때까지 변화합니다.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신체의 움직임입니다. 움직이면 뼈에서 ‘오스테오칼신 osteocalcin’이란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기억력과 인지능력을 개선하고 불안감 해소에 도움을 줍니다. 장 자크 루소는 “걸음을 멈추면 사고가 멈춘다. 다리가 움직일 때만 뇌가 작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처럼 몸의 움직임은 곧 ‘정신’입니다. 머리 쓰는 일이 점점 늘어가는 세상이기에 그만큼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앞서 말한 ‘생각을 단순화하는’ 데도 걷기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셋째 A, ‘어펙팅 Affecting, 마음을 유연하게 하라.’ 생리적으로 인간의 감성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쇠퇴합니다. 똑같은 상황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흥은 다르지요. 오감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며, 잘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줍니다. 세상을 적극적으로 경험하고 참여하십시오. 나는 여행지에 가면 미술관, 교회나 성당, 사찰과 같은 종교 시설, 사람들이 들끓는 시장이나 다운타운 등을 중심으로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자극이 감수성을 키워줍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걸음도 불편한 나는 요즘 요양 보호사 선생에게 시를 읽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감각을 키우고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나만의 방법입니다.
넷째 R, ‘릴랙싱 Relaxing, 몸과 마음을 이완하라.’ 충분히 휴식하라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내 세대는 쉴 줄을 몰랐습니다. 밤낮없이 일하는 산업 일꾼의 시대를 살았기에 지금도 일요일에도 연구실에 나와야 마음이 편합니다. 시대가 바뀐 오늘날의 휴식은 또 다른 면에서 의무가 된 듯합니다. 휴식하겠다고, 온갖 준비와 계획을 세우느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휴식은 다음을 준비하는 에너지입니다. 특별한 곳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무엇을 하는 것만이 휴식은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쉼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덟팔자로 누워 있기, 생각을 멈추고 내려놓는 일도 좋은 휴식법입니다. 일할 때는 집중해서 일하고 쉴 때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십시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말년에 한 말입니다. “내가 80세가 된 오늘까지 연구를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은, 앉을 수 있는 곳에 앉고 누울 수 있는 곳에서는 누워 쉬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다섯째 T, ‘투게더링 Together-ing, 함께하고 나눠라.’ 나눔은 봉사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나의 모든 일상이 나눔과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환자를 진료하면서 나는 베푼다는 생각 대신 나 또한 치유 받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일방적인 베풂은 없습니다. 주고받음이 세상의 정연한 이치입니다. 불교에서 하늘은 인드라 신의 그물로 뒤덮여 있다고 비유합니다. 그물 이음새마다 작은 구슬이 달려 있는데 구슬은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비추고, 인드라 신이 그물 한 코를 집어 들면 나머지 그물이 일제히 달려 올라갑니다.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됩니다. ‘무인무연설 無因無緣說’은 원인도 결과도 없는 이 세상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나를 낮추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환자들은 치료에 지칠 때면 한 번씩 묻습니다. “선생님, 저는 왜 태어나서 이 고통을 받습니까?” 그러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답하지요. 태어났으니까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물음에는 어떤 답을 할까요. 이 질문 역시 저마다 삶의 무늬가 다르므로 어떤 답도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겠지요. 확실한 것은 태어남은 기적이며, 태어난 이상 우리는 각자 가진 삶의 조건을 토대로 좀 더 나은 사람, 점점 성장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원고를 쓰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시구를 더듬으며 ‘나의 지난날을 털면 미세먼지나 나오겠지’ 하고 자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막상 엄청나게 큰 먼지 뭉치가 나오더군요. 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고 한 시인의 마음을. 우리의 삶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죽을 때까지 미완성이며, 결국 하루하루 성숙해지는 삶을 살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시인은 결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습니다. 볕 좋은 날, 10주년 기념 감사의 글을 쓰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 10년간 ‘인간 이근후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고 짧게 소식을 전해드리며,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또 열심히 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전합니다.
2023년 4월 새봄, 세심정에서
이근후
| Prologue |
당신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 속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50년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내가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삶의 지혜를 통달한 줄 안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적당한 주름과 은빛 머리칼까지 갖추니 원숙해 보이는 나의 풍모가 그런 오해를 더하는 듯하다.
인생을 잘사는 비결 하나쯤 기대하고 질문을 던진 이들은 아마도 나의 대답이 싱겁기조차 할 것이다. 가령 어떤 이들은 “요즘 하루를 어떻게 여십니까?”라고 묻는데, 뻔한 하루를 특별하게 시작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속셈이다. 나는 대답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텔레비전을 켭니다. 이불 속에서 좀 더 자볼까 싶고 또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이 떠올라 눈을 뜨기 싫지만 뉴스를 들으며 차츰 잠에서 깨어납니다.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은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감사와 다행감으로 가벼워지지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인생의 이런저런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럼에도 습관적인 하루에 지치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나로서는 솔직한 고백이다. 나이 듦에 대한 물음도 비슷하다. “나이 들면 뭐가 좋은가요?” 하고 묻지만 나는 “나이 들면 뭐가 좋겠습니까?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보통의 노후라면 평생 아이들 키우느라 모아 놓은 돈도 많지 않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다. 생물학적 노화와 사회적인 쇠퇴, 앞날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그러나 나의 답은 계속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생의 궤적입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라기보다 나이 들면서 좋은 일, 즐거운 일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지요.”
정신과 전문의로 은퇴한 뒤 나에게 감투를 주려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점이다. 자존심을 세워 주는 그럴 듯한 자리라도 나는 명예보다는 즐거움, 책임보다는 재미를 택하면서 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젊은 날의 나는 무엇이든 재미를 택하려고 애썼다. 재미있는 일만 골라 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재미있는 쪽으로 만들어 갔다. 서너 평 남짓한 진료실에서 하루 종일 환자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쏟아내는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은 커다란 쇠공을 매단 듯 무겁고 어두워지곤 했다. 내가 그들을 완벽하게 낫게 해 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자고. 그러자 좋은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정신과 폐쇄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환자들이 속마음을 털어내는 사이코드라마를 시도하고, 정신이 아플 뿐 몸은 건강한 환자들을 위해 체력 단련실을 만들었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는 신이 났고 즐거웠다. 한마디로 ‘재미있게 견디기’다. 그래서 나는 50여 년의 정신과 의사 생활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러셀은 말했다.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고.
그런 재미를 추구한 덕분에 노년이 된 지금, 나는 심심하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정신과에 관한 교육과 상담은 물론, 한 사이트에는 아동기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자료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매일 올린다. 보는 사람도 재미있다 하지만 정작 제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또 컴퓨터로 젊은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외에도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악스카이웨이 천천히 걸어서 다녀오기, 30년 동안 의료 봉사를 해 온 네팔 1년에 한 번 방문하기, 한 달에 한 번 시 낭송 모임, 40년 동안 봉사해 온 보육원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 주기, 주말마다 네 자녀 가족과 돌아가며 저녁 식사하기, 보고 싶은 사람 불쑥 방문하기 등, 지금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나의 노년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도 부러워하지 마시라. 누구든 재미있게 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온통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젊은 시절 느끼던 재미와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똑같은 재미를 느끼는 일은 정말 재미없지 않을까. 바로 지금 나이에,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진짜 재미다. 젊어서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이 재미있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젊어서의 재미만 생각한다면 노년은 불행하기만 하다. 바로 지금, 자신에게 맞는 재미를 찾는 것이 진정 ‘나이 답게’ 늙어 가는 일이다.
요즘 방송 토론에서 노인의 급격한 증가로 우리 사회가 짊어질 재정적 부담에 대한 걱정을 자주 거론한다. 돈이 없는 노후는 곧 고통이자 절망이라는 분위기다. 경제적인 풍요가 꼭 아름다운 노년을 만들어 주지는 않음을 알면서도 우선 돈부터 해결하자고 한다. 물론 경제적 준비는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나이 듦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젊은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나이 듦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런 진지한 성찰을 통해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평생 시험, 취업, 결혼 준비 등 많은 준비를 하지만 정작 나이 듦의 준비는 소홀하다. 나이 드는 것도 반드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막상 닥치면 당황하고 실수하기 마련인데, 나이 든 후에 시작한다면 너무 늦다.
그동안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왔다.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 주며 내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하면 치료의 문은 조금씩 열리는 것이다. 늘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온 내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 할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지만, 사람들에게 내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한편으로는 지난 내 삶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덜어내는 기분이다. 나의 이야기가 인생 선행 학습의 작은 자료로 활용되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작은 불씨가 된다면 아주 기쁠 것이다.
2013년 2월의 아침에
이근후
chapter 1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뭐가 그리 억울한가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는 / 나는 행복합니다.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깨어날 수 있는 / 나는 행복합니다. (중략)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 나는 행복합니다.
-김수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중에서
“나이 들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백발의 노신사가 젊은이에게 한 말이다. 젊을 때는 나이 드는 것이 싫고 노인의 부정적인 모습만 떠올리지만, 실제 나이 들어 보니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재미없는 나이가 어디 있으랴. 물론 스무 살의 즐거움과 마흔, 쉰 살이 되었을 때 느끼는 삶의 즐거움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달라서 더 특별하고 가치가 있다. 그걸 모르고 현재 나의 상태를 다른 시기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일생토록 후회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을 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슬픈 삶이다.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알맞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며 산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음양이 있기 마련이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젊음의 열정과 에너지가 오히려 젊음을 좌절시키기도 한다. 힘없고 느리기만 한 늙음이 천천히 익어 가는 술처럼 그윽한 인생의 향을 품어 낸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늘 좋으리란 법은 없으며 나쁜 것이 언제나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는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노력을 기울여 보완하고, 장점은 갈고 닦아 내 삶에 힘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기운을 북돋아 나쁜 기운을 잠재우도록 해야 한다.
중년 이후를 ‘바로 본다’는 것은 나이 들어 좋아지는 것과 나빠지는 것을 구별하고 이해하는 데 있다. 나이가 들면 분명 나빠지는 것들이 있다. 가장 확실하게 나쁜 것은 바로 육체의 노화다. 사실 나이 들면 건강이 나빠질 일만 남았지 거꾸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는 누구나 알지만 스스로에게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입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래도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 계속 붙들려 있으면 억울함과 애석함만 커질 뿐이다. 노화, 즉 몸의 변화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응이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이런 말을 했다.
“ (나이가 들어)불편한 것은 돋보기를 꺼내야 하니 책 보는 게 거추장스럽죠. 하나님은 다 좋은데 늙어서 눈은 나쁘게 하지 말지, 그걸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이 먹어서 책을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그러면 앞에 나서게 되니, 그냥 뒤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눈을 나쁘게 했나 보다라고요.”
김혜자 씨의 부드러운 미소와 딱 맞아떨어지는 생각이다. 이런 자세라면 나빠지는 청력과 시력에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보청기를 끼고 돋보기를 쓸 것이다. 보청기와 돋보기는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젊어서 듣지 못했던 소리,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까지 보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고마운 물건이다.
또 하나, 나이 듦이 두려운 이유가 기억력이 떨어지는 뇌력 저하다. 이런저런 약속과 집안 행사를 잊어버린다거나 지갑이나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이런 정말 늙었나 봐!’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비아냥대기도 한다. 이 말이 입버릇이 되면 나도 모르게 더 빨리 나이 들어 버린다.
나도 수첩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 둔 것을 잊어버려 고생한 일도 있고, 바로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은 적도 여러 번이다. 처음엔 충격이 컸다. 하루 종일 사라진 기억을 생각해 내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수십 년 뇌 속에 쌓아 왔으니 용량이 꽉 찼을 것이다. 이젠 나의 뇌가 알아서 자동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입력시키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생각이 느려지고 행동이 둔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한창 때의 젊은이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나이 듦의 미덕이다. 생각해 보라. 나이 들면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적어지고 나를 찾는 사람도 줄어드니 바삐 서두를 것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든 천천히 해도 혼낼 사람이 없으므로 마음 푹 놓고 하면 된다. 사실 나이 들면서 가장 넉넉해지는 재산은 시간이다.
얼마 전 나이 드니까 음식 맛이 없어졌다고 자못 억울한 표정을 짓는 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을 찾아 구석구석 맛집을 순례한다는데 그 맛이 아니란다. 그러나 평생 하루 세 끼, 온갖 음식을 줄기차게 먹으며 살아 왔는데 혀가 둔해질 때도 되었다. 나이 들면 혀의 맛이 아닌 다른 데서 삶의 맛을 찾아보라는 신의 계시쯤으로 생각하면 어떻겠느냐고 나는 그의 억울함을 달래 주었다.
또 누군가는 나이 들어 좋은 것은 지하철 공짜표밖에 없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나이 들면 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공짜표가 어디인가. 아마도 나이 들었다고 무료로 지하철을 태워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굉장한 혜택이다. 거기에 박물관 입장료도 깎아 주는 등 찾아보면 이런저런 경로 우대 혜택이 많다. 지하철에 타면 젊은이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기도 한다. 맡아 놓은 자리처럼 앉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자가용이 따로 없다.
사실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억울해하지만 않는다면 굉장히 행복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억울한 생각만 하면 무기력해지고 우울감에 빠진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은 생활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책임도 의무도 줄어든다. 시간이 늘어나고 인내심이 많아지고 감정이 섬세해진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불어난 시간에 하나씩 해 보는 재미를 누리는 것도 좋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거나 악기를 배워도 좋으리라. 더디 진도가 나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칭찬해 주리라. 나이가 들면 긴 시간이 드는 일을 찾아 제대로 시작해 보라. 잘 안 되도, 서툴어도 시간이 넉넉하므로 ‘내 자신’을 기다려 줄 수 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하다. 주위에는 밤에 자다가 세상을 떠난 동창이나 선후배가 많다. 나 또한 내일이 반드시 예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와! 눈떴구나! 하하하’ 하고 쾌재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이라니!
젊을 때는 이런 신비감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그때는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 남은 생물학적 여명이 적다는 데서 오는 하루하루의 희열감에 매일 아침이 행복하다. 이것도 나이 든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다. 일본 시인 잇사의 하이쿠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 딱 내 심정이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 간다고 억울해하지 마라. 제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하지 마라.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살았고 일했고 즐겼다. 지금 내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더 급하다. 내가 쓸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다.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깨달은 것들

나는 기적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그 기적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겸허해야 하며, 절대 욕심부리지 말아야 하며,
더러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엄홍길, 《괜찮아, 살아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아름다운 말, 도전’ 중에서
사춘기 시절 내 키는 이미 170센티미터를 넘어섰다. 그러나 키만 컸지 한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닐 만큼 병약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운동도 없었다. 혹시나 변을 당할까 물 근처에도 못 가게 했던 어머니 때문에 수영도 못 배웠다. 그래서 꿈속에서 헤엄을 치는 게 다였다. 덩치 좋은 건달들에게 맞은 적도 여러 번이다. 잘못도 없이 용서를 구하는 모멸감도 당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대학 진학은커녕 밥도 굶어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를 그만둘까 말까, 내 얼굴에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는지 하루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근후야, 쌀이 없어도 쌀뒤주는 보지 말거라.”
쌀이 없는 걸 아는데 왜 굳이 빈 뒤주를 보고 걱정하느냐는 말이었다.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은 없다는 걸 어머니는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 삶에는 많은 위험이 있었다. 전쟁, 가난, 병, 천재지변, 사고 등 그 위기의 순간들을 나는 용케 잘 지나왔다. 다섯 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났다. 일제의 가미카제 소년병으로 초등학생들이 차출되어 갔을 때 나는 열한 살이어서 제외되었다. 학교에서 장난치며 놀던,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아이들은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병으로 차출되던 날 천황에게서 하사 받은 일본도가 목숨의 대가였다. 그땐 그 일본도가 부럽기만 했던 철부지였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죽음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데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아슬아슬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머니께서는 조상의 보호 덕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인연의 힘이 나를 삶의 길로 가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우연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그러니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그때까지 가장 센 태풍으로 알려진 사라호 태풍이 불어닥쳤다. 사망자와 실종자는 800명이 훨씬 넘었고 이재민도 37만 명이 넘었다. 그 어마어마한 태풍이 한반도를 지날 때 나는 독도행 배를 타고 있었다. 70톤 경비정은 엄청난 비바람에 추풍낙엽처럼 흔들렸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파도에 묻힐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갑판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뱃멀미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살려 달라 기도를 올리는 중에도 나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기세에 한 선원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헤엄칠 줄 알아요? 몰라요?”
겨우 눈을 뜨고 상황을 대충 파악했지만 잠결인지 멀미 탓인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수영 못 하는데요…….”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바로 물에 빠져 죽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에잇,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느새 나는 또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파도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깨어 있었다면 죽음의 공포에 패닉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물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눈 꼭 감고 순응하니 위험 상황이 지나갔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순리를 따르라.’ 그때 나는 터득했다. 뒤주를 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도 같은 뜻일 것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모두 두세 번 이상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구절절 비슷한 경험도 많다. 아니, 누구라도 인생의 수많은 고비를 넘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일들을 겪으며 산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나는 ‘내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매사에 후회가 적고 만족할 수 있었다. 내 행복의 비결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심장 혈관이 막혀 큰 수술을 받았다. 50퍼센트의 죽음과 50퍼센트의 삶, 그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살았다. 또 한 번의 덤이었다. 언젠가는 이 덤도 끝날 테지만 그때까지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나이 들고 아프고 기력도 쇠했다. 그러나 삶은 죽음보다 나은 것이다. 나나 당신이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행복한 존재다.
왜 외롭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낭비된 인생이란 없어요.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뿐이지요.”
-미치 앨봄,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중에서
한 신문사에서 우리 부부를 인터뷰했을 때 아내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백이면 백 명 모두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에요.” ‘그래?’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 역시 아내의 눈이 정확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한 번 왔다 가는 기자의 이름과 나이, 취미 등을 물어보고 기억해 둘 정도다.
지난 2월, 구정 무렵 휴전선 근처 연천에 사는 최오균 선생 집에 다녀왔다. 그는 50대 후반으로 10여 년 전, 네팔 의료 봉사를 함께 가면서 알게 되었다. 며칠째 추운 날이 계속되었지만 나는 연천행을 감행했다. 날이 풀린 후에, 따뜻한 봄이 되어 찾아가도 될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배려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노인’인데 약속 좀 미뤘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섬진강 근처에서 살 때도 언제 한번 찾아가겠다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또 약속을 어기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50년 만의 추위라며 괜찮겠느냐고 나의 방문길을 걱정했다. 추위야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그만이었다. 초행길이라 헤맬 수도 있지만 내비게이션이 있다. 나는 두툼한 점퍼에 러시아 털모자까지 쓰고 일행과 함께 아침부터 서둘러 연천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날, 최 선생에게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었더니 농담처럼 군량미가 떨어졌다기에 쌀 한 포대와 라면 한 박스를 샀다. 그가 사는 마을은 비무장지대 코앞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도착했다. 최전방이 서울에서 이렇게 가깝다니 놀랐다. 머릿속의 생각과 현실은 이렇듯 자주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를 보는 눈빛과 행동에 기쁨이 묻어 있었다. 진심으로 맞아 주기에 나 또한 반갑고 좋았다. 그는 비무장지대에 얽힌 마을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사이 그는 연천 홍보대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홍합짬뽕을 시켜서 조그만 탁자에 둘러 앉아 후후 불어 가며 홍합을 까먹었다. 얼큰하고 시원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는 짬뽕 맛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이 약한 아내를 위해 시골 살림을 선택했다. 2층에 다락방까지 있어 참 좋지만 남의 집이라 아쉽다기에 내가 말했다.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는 별 의미가 없지요.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사라는 인연으로 만나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어 이 추운 겨울, 지척에 비무장지대를 두고 홍합짬뽕을 나눠 먹는 나와 최 선생,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싶었다.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운 뒤 우리는 근처 ‘화이트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모닝커피를 시켰다. 모닝커피는 커피에 날달걀을 풀어 넣어 마시는 것으로 1960년대 유행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가끔 들르던 다방에서 아내의 아버지와 종종 마주치곤 했는데, 어른께서는 꼭 모닝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당시 나는 미래 장인이 될 분이기에 커피 값을 몰래 내드리고 싶었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그런데 그 모닝커피가 메뉴판에 적혀 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나는 지금은 맛보기 힘든 귀한 모닝커피를 주문하고는 최 선생에게 빛바랜 사진 같은 내 연애 시절 이야기를 덤으로 들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화이트 다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악수를 나누고 눈 덮인 들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온기가 가득한 집 안으로 들어서자 몸이 노곤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오늘 하루 추위 때문에 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마음먹고 조금 더 몸을 움직여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옛 추억까지 더듬을 수 있었으니 참 값진 하루였다.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이다. 고독사 孤獨死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인간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꼭 외로움이겠는가? 혼자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외로워서 인생이 불행해지는 게 아니다. 혼자 있는 게 두렵고, 외로움이 무섭다면 외롭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이 당연한 이치를 회피한 채 ‘나는 왜 외로울까, 인생 헛살았나’ 하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인지 모른다.
노후 대비로 젊었을 때 보험이나 연금을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로움에 대비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 ‘적응’이다. 살다 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꼭 온다. 그 상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는 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경제적 준비를 잘해서 연금이 많이 나온다 해도, 그 연금을 쓸 능력이 없으면 그것 또한 고통이다. 단지 저축을 많이 하고 돈 쓰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너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궁금증과 관심에서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궁금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정신과 전문의 수련을 받던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환자를 언제 퇴원시키면 됩니까?” 그에 대한 교과서적인 기준은 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교과서에 없는 기준을 이야기하는데 그때도 그랬다. “환자가 사랑하는 능력이 생기면 퇴원시켜도 좋습니다.”
부연하자면 정신과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대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증거는 주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 정서를 표현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면, 이미 이 환자는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므로 이제 그만 퇴원해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랑도 능력이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진다.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나이 먹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고 그가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일에 머물지 않고 끝없는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봉사로 연결되어 넓고 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가족아카데미아, 네팔 의료 봉사, 보육원 봉사, 시 낭송회 모임 등 수십 년간 이어 온 많은 일들을 어떻게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었겠는가.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주위에 늘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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