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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캠페인] 강남순 교수가 말하는 '성소수자,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by 행복한게이 2024. 9. 14.

https://www.youtube.com/watch?v=sM1wIFUYlwA

 

 

반시대적 교리에 갇힌 ‘철학자 예수’ 구출하기 [책&생각]

 

신의 나라는 차별‧편견 없는 나라
사랑‧용서‧환대‧정의 패러독스 사유

기자고명섭
  • 수정 2024-05-24 09:47
  • 등록 2024-05-2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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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은 한국 교회의 성차별주의 벽에 부닥쳐 한국을 떠난 뒤 2006년부터 미국에서 ‘펜을 저항과 변혁의 무기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여성 신학자다. ‘철학자 예수’는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반시대적 교리가 예수를 배반했다고 비판하고, 사랑‧용서‧환대‧정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냄으로써 낡은 교리의 감옥에서 예수를 구출하려는 작업이다.

 

이 책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예수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구세주‧메시아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예수를 새로이 발견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예수를 소크라테스와 비교하는데,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그 두 사람이 ‘묻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물음을 던져 무지를 일깨웠듯이 예수도 지치지 않고 질문했다. 신학자 마틴 코펜하버가 계산한 바로는 복음서의 예수는 모두 307번의 질문을 했고, 183번의 질문을 받았으며, 이 183번의 질문 가운데 답변한 것은 3번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가 ‘답’이라고 말하는데, 지은이가 보기에는 예수야말로 ‘질문’이다. 예수는 무수한 질문으로 지혜를 찾은 사람, 그래서 철학자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거리의 철학자’였다.

 

이 거리의 철학자가 벌인 운동을 간략히 ‘복음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 곧 ‘좋은 소식’이란 ‘신의 나라’가 오리라는 소식이다. 이때의 신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출신‧인종‧성별‧종교‧계층‧장애‧국적과 무관하게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정의의 세계다. 예수가 말한 신의 나라는 ‘아직 오직 않은 세계’, 그래서 ‘도래할 세계’에 대한 메타포다. 지은이는 자크 데리다, 존 카푸토, 한나 아렌트를 사유의 동반자로 삼아 그 메타포를 해석해 나간다.

 

예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랑’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전하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기에 나타난 대로 예수는 ‘서로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웃 사랑의 계명은 구약성서 ‘레위기’에도 나온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듯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지은이는 ‘이웃’의 범주가 달라졌음에 주목한다. 구약은 유대인 안에 머물러 있지만, 예수는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치워버렸다. 그 사태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유대인들이 적대시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참된 사랑의 표본으로 삼은 데서 예수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선 사랑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사랑은 ‘이웃’도 넘어선다. 예수는 “만약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문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예수는 원수 사랑을 새 계명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충실한 것인가’를 묻는다. 여기서 지은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나는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을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었음을 상기시킨다. 기독교인은 신을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품은 사랑의 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아우구스티누처럼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신학자 카푸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을 바꾸어 ‘신을 사랑할 때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가’라고 묻는데, 카푸토의 물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을 더 구체화함으로써 내 사랑의 한계를 더 명확히 보게 해준다.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은 ‘용서’다. 사랑은 용서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용서를 여러 차례 이야기하는데, 그때마다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로 이야기한다. 왜 “나는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능동태로 말하지 않고 수동태로 말하는가? 지은이는 능동태로 말하는 순간,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위계가 정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용서하는 사람이 높아지고 용서받는 사람이 낮아지는 그런 위계를 거부했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아렌트와 데리다의 용서관을 비교한다. 아렌트는 나사렛 예수야말로 “인간사의 영역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가 말한 ‘새로 태어남’(거듭남)이다. 인간은 새로 태어날 수 있기에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용서에는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용서는 사회정치적 영역의 용서다.

여성 신학자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반면에 데리다에게 용서는 전제조건이 달리지 않는다.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모순어법으로 용서의 패러독스를 이야기한다. 그 패러독스는 데리다가 ‘자기 용서’를 이야기할 때 더 분명해진다. “한편으로 나는 언제나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데리다의 용서는 인간의 유한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한자인 인간은 자기를 용서할 수밖에 없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그 용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타인의 잘못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용서가 불가능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절대적 용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용서는 아렌트의 용서와 데리다의 용서를 아우르는 곳에 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가르친 용서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는 무조건적 용서라는 사실이다. 예수와 만날 때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것이 이 무조건성의 명령이다. 신앙은 가능한 것을 따르는 평온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열정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 열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가두는 편견의 울타리를 넘어 멀리 갈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41872.html

 

반시대적 교리에 갇힌 ‘철학자 예수’ 구출하기 [책&생각]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강남순 지음 l 행성B l 2만원 강남순(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은 한국 교회의 성차별주의 벽에 부닥쳐 한국을 떠난 뒤 2006년부

www.hani.co.kr

 

"철학자 예수", 예수 따르기 위한 탈상투화  기자명 정현진 기자 / 입력 2024.06.07 15:24 / 수정 2024.06.11 16:07 

예여공 월례 모임에 강남순 교수 강연

‘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이하, 예여공)이 31일 강남순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최근 “철학자 예수”라는 책을 낸 강남순 교수(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는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라고 부제를 덧붙여, “철학자 예수라는 개념은 이 땅에 몸담고 살았던 예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먹고, 그들 삶의 문제에 개입하고 연대하며 살았던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되새기고자 하는 시도와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강남순 교수의 강연은 “철학자 예수”의 내용과 맥락을 중심으로 다뤘다.

 

“예수를 철학자라고 한 것은 예수를 탈상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철학자로 부르던 구세주라고 부르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예수를 그리스도교의 독점물로 보는데, 예수는 독점물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예수를 어떻게 따르고,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강남순 교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따른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혹은 여겨 왔던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을 볼 텐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물음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뿌리까지 아래로 내려가 질문을 다시 해 보는 것, 쓰여 있지 않은 것까지 상상하면서 질문하고 읽어 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살았던 1세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21세기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껏 초월적 존재, 구세주라는 인식을 넘어 탈상투화하고, 예수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러 온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예수에 대한 상투화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심오한 말을 예수를 그리스도교 안에 가둬 놓는 배타주의의 텍스트로 이용하는 것이라며, “예수를 따르려면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와 그리스도교는 일치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사명은 예수 자체와 제도화된 그리스도교 간의 엄청난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 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구조에서 작동시키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강 교수는 예수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간극을 보여 주는 현상 중 하나를 한국 사회의 혐오와 불평등으로 꼽았다.

성소수자와 난민, 여성, 북한, 장애인.... 다차원적 위계, 다르고 약한 존재를 위험하고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식이 바로 불평등과 혐오의 시작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저주하며 혐오 세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철학자 예수”를 쓰게 된 여러 동기 가운데 하나가 그런 장면들을 목격한 것이고, “예수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 포용, 환대, 타자에 대한 책임과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를 들여다보고, 예수와 우리의 구체적 삶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이 5월 31일 강남순 교수 초대 강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강 교수는 최근 출간한 책 "철학자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현진 기자

 

예수라는 존재의 탈상투화

강남순 교수가 보는 상투화된 예수는 학습되지 않은 예수다. 곧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 삶 안에 예수를 비춰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탈상투화 하는 것은, 성경 문구 속에 박제되고,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수에 대해, 그리고 성경 내용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에 대해 전혀 다르게 질문하는 것이다.

 

“주일을 지낸다는 것은 교회나 성당에서 좋은 옷 입고 앉아 헌금 내고, 돌아와서 자기 만족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매일을 살면서 묻지 않았던 질문, 마주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마주하는 것이 주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근원적 문제들,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들입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예수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다양한 가르침들을 내 유한한 삶 속에서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느냐는 것이고, 그것에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가?

강 교수는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가 상투적이듯, 가장 최고의 계명인 이웃사랑 역시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면서,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야 타자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시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면서, “이웃의 범주 역시 상투화될 수밖에 없다. 다른 젠더, 인종, 장애인도 이웃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관계가 상투화될 때, 그것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예수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 이유 중 하나는 언제나 죄인들과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소위 죄인이란 사회 주변부에 있던 이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강남순 교수는 이웃 사랑, 예수의 환대와 포용을 말하며, 성경 속 자캐오 이야기(루카 복음 19장 1-10절)에 상상력을 더해 보라고 주문했다.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죄인의 친구 예수', 지거 쾨더 작. 

 

세금 징수원인 자캐오. 로마제국이 고용한 유대인으로 부당한 세금징수 때문에 천시받은 세리였지만, 예수는 그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캐오는 예수의 환대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강 교수는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이 한마디는 그 어떤 종교적 심판이나 강요도 아니었고, 단지 자캐오를 함께 먹고 대화하는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초대한다면서,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사람 취급했다는 느낌이 자캐오를 회개하도록 했고, 그것이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사랑한다는 고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제도의 마련이며, 배제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 사랑이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가를 생각한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질문이 바로 정의”
“예수가 살려던 삶은 무한한 끌어안음”

 

“한 존재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예수의 사랑과 정의의 철학”이라는 강남순 교수는 다시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예수의 질문 방식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예수는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강 교수는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이 중요하고, 배운다는 것은 좋은 질문을 배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어떤 불의가 있는가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불평등이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치열하게 학습하는 것만이 희망”이라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어떤 불의와 차별이 있는가를 공부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배고픈 이들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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