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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독서창고

천원을 경영하라

by 행복한게이 2025. 6. 21.

이책은 지난번에 한국의 다이소가 국민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저렴한 가격에 품질도 좋다는것을 듣고, 궁금해서 골라봤다. 

저렴한 가격의 제품은 보통 싸서 한번쓰고 버리는개념의 제품인데....다이소 제품은 품질도 좋아서 가성비가 좋다는데...

이책을 읽어보면 창업자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는 제품을 만든다는것을 알게된다. 싸면서도 품질도 좋은....그래도 천원의 가격을 유지해가는....이 시대에 보기드문 기업이다. 

 

처음으로

저자소개

 

 

박정부

 

아성다이소 창업자이자 회장

 

 

국민가게 ‘다이소 신화’를 만들어낸 한국 균일가 사업의 상징으로 불린다. 미국의 1달러숍, 일본의 100엔숍과 차별화된 한국 균일가숍의 원형을 만들고 3조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남들이 은퇴 후를 계획할 45세에 무역업으로 도전을 시작하여 10년을 준비한 끝에 1997년 천호동에 1호점을 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남다르게 시작한 다이소는 현재 1,500여 매장, 용인 남사와 부산의 최첨단 물류허브센터, 3만 2,000여 종의 상품으로 매일 100만 명의 고객이 찾는 국민가게로 사랑받고 있다. 고객의 땀이 밴 소중한 1,000원의 가치를 상품 하나하나에 담아내는 일에 열정을 쏟아부은 결과다. ‘운명과 세상을 바꾼다’는 신조로 고객에게는 놀라움과 감동을, 수많은 기업인에게는 영감을 주고 있다.

박정부 회장은 석탑산업훈장, 철탑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한국유통대상(대통령상), 유통명인상(대한상공회의소), 생산성경영자대상(한국생산성학회), 서울대AMP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다이소는 알면 알수록 놀라운 회사다. 매달 600종의 신상품이 출시되고, 전국 1,500개 매장에 매일 100만 명의 고객이 찾아온다. 하루에 판매되는 물량이 수백만 개다. 2030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이자 ‘다이소 증후군’, ‘다세권’, 같은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가격, 상품 다양성, 매장 접근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리 경쟁자가 자본과 물량으로 밀고 들어와도 도무지 경쟁이 안 되는 압도적인 격차를 만들어낸 것이다. 경영학계에서도 보기 드문 성공 사례로 손꼽히며 다양한 주제로 연구되고 있다. 25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이어온 비결은 무엇인가? 요즘같이 일확천금의 유혹이 커진 시대에, 기본을 지키며 견고하게 회사를 성장시켜온 비결은 무엇일까?

창업자인 박정부 회장은 유통업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유명하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지키고 당연한 것을 꾸준히 반복했다.”는 겸손한 말로 책을 시작하지만,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몰입해 만들어낸 성과다. ‘천 원짜리’를 위해 수천억을 투자해 물류센터를 짓고, 세세한 것 하나까지 직접 테스트하며 군더더기는 모두 덜어내고 업의 본질에만 집중한 결과다. 이 책은 박정부 회장이 처음으로 직접 밝힌 다이소의 성공비결과 경영 노하우가 가득하다.

차 례

 

 

 

 

프롤로그천 원을 경영하면 3조를 경영할 수 있다

 

 

Part 1. 열정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마흔다섯,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천 원의 보복

더 간절한 쪽으로 에너지가 모이는 이치

3단 이민 가방 2개에 작은 손가방 하나

뿌리를 내리는 시간

야노 회장과의 만남

위험한 동거

“손님 그만 받습니다!”

“일본 기업 아닌가요?”

여기까지인가!

천 원을 위한 천억 원의 투자

자전거와 헬리콥터

 

 

Part 2. 본질만 남기고 다 버려라

역주행 회사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돈, 천 원

가격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와 철학

마진이 아니라 만족을 좇아라

건전지, 일본 상륙작전

틈새는 있는 법

정독해라, 상품은 다독하면 안 된다

생활과 문화를 팝니다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회사

2030이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

우리는 고객이 이끄는 대로 간다

중요한 것은, 본질에 얼마나 집중했느냐

 

 

Part 3. 천 원짜리 품질은 없다

문제도 해법도 항상 현장에 있다

매장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보이지 않는 상품이 어떻게 팔릴까?

다섯 번의 거절

천 원짜리 상품은 있어도 천 원짜리 품질은 없다

‘품질’이란 처음부터 올바르게 하는 것

디자인도 품질이다

숯도 한데 모여야 화력이 세진다

일이란 챙기는 만큼 결과가 나온다

보이게 일하라

“다이소에서 만나!”

‘국민가게’라는 별명에 담긴 뜻

 

 

에필로그고민하는 집요함이 운명과 세상을 바꾼다

프롤로그 천 원을 경영하면 3조를 경영할 수 있다

프롤로그

 

 

천 원을 경영하면 3조를 경영할 수 있다

 

 

 

 

몇 년 전, 한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지갑을 보여달라는 말에 적이 당황했다. 돈을 얼마나 갖고 다니나 궁금해서 그런가? 현금 쓸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넉넉히 갖고 다니는 편이었다. 나는 외투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 보였다. 기자는 뭔가 찾으려는 듯 고개를 숙여 지갑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 여기 있네요.”

천 원짜리 서너 장을 확인하고 기자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 원짜리를 갖고 다니시나 해서요.”

인터뷰 내내 천 원짜리 상품의 가치에 대해 줄기차게 강조해놓고 혹시 지갑 속에 고액권만 두둑이 넣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지폐 사이에 꽂아놓은 것 말고도 신분증 사이에 딱지처럼 접어둔 천 원짜리도 꺼내 보여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지갑 속에 천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을 부적처럼 꼭 넣어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을지 몰라도 균일가숍을 하는 내게 천 원은 특별했기 때문이다.

 

 

천 원의 힘

 

현재 우리나라에서 화폐로 사용되는 것은 지폐 4종과 동전 4종이다. 동전은 거의 쓰임이 없다 보니 지폐의 최소 단위인 천 원권이 많이 사용된다. 천 원은 그만큼 경제의 바탕이 되는 돈이기도 하다.

신용카드로 대부분 결제하는 요즘이지만 막상 천 원짜리가 없어 불편한 적이 한두 번쯤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구형 자판기의 지폐 투입구는 천 원짜리 지폐만 인식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먹거나 지하철 탑승권을 끊을 때, 음식점 주차장에서 발레파킹 수고비를 지불할 때도 천 원짜리 몇 장을 갖고 있으면 아주 요긴하다.

그만큼 많이 사용하다 보니 다른 지폐에 비해 천 원은 너덜너덜하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기 일쑤였고, 옛날에는 급할 때 전화번호나 이름을 적기도 한다. 이래저래 몸으로 때우며 험한 꼴도 많이 본 지폐다. 마치 굳은살이 박이고 손일 많이 하신 우리 어머니의 주름진 손 같다. 그래서 나는 천 원을 좋아한다. 천 원이야말로 성실함이 무엇인지, 땀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내게 묻는다.

“어떻게 천 원짜리 팔아서 3조 매출을 할 수 있죠?”

아성다이소가 눈부신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1997년 첫 매장을 연 후 25년 동안 약 1만 배 이상 성장했고,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적이 없으며,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도 꾸준히 사랑받았다. 물론 탄탄대로만 달려온 것은 아니다. 휘청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 원의 힘’ 때문이었다. 만리장성도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되었듯, 3조 매출도 천 원짜리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10만 원짜리 상품은 1개만 팔아도 매출이 10만 원이지만, 1,000원짜리 상품은 100개를 팔아야 10만 원이 된다. 100번 더 움직이고, 100번 더 진열하고, 100번 더 계산하고, 100번 더 닦아야 가능한 일이다. 내게 천 원이란 이처럼 매 순간 흘려야 하는 땀방울이고, 그 땀방울이 만든 성실함이자 정직함이다. 기술이나 요행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았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성취다.

2002년 ‘1억 불 수출의 탑’을 받았을 때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1억 불을 수출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해본 적이 없다고. 30센트, 40센트짜리가 모여 어느 날 1,000만 불, 2,000만 불이 되었고, 5,000만 불, 1억 불이 되었을 뿐이다. ‘연매출 3조를 해야지’라든가, ‘매장을 1,500개 오픈해야지’ 하는 목표도 세워본 적 없다. 그저 좋은 공간이 있으면 매장을 열었고, 팔릴 만한 상품이 있으면 개발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지키고 당연한 것을 꾸준히 반복했던 것, 그것이 오늘날 아성다이소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천 원 한 장에 올인하다

 

얼마 전 어느 조사에서 * ‘20대 소비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로 다이소가 뽑혔다. 참으로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과 함께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 조사, 라이프스타일숍 부문(2019년).

 

흔히들 요즘 젊은이들을 7포 세대라고 한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포기한 세대, 그래서 ‘이번 생은 망했다’를 줄인 ‘이생망’이란 말도 유행이다. 수많은 젊은이가 “정직하고 성실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요?”, “노력한다고 그만큼 결과가 나오나요?” 하고 의심한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이 패배감과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성세대로서 무척 마음이 아프고 일말의 책임감도 느낀다.

흙수저였던 내가, 아니 흙수저 정도가 아니라 무수저로 남들은 다 퇴직하는 마흔다섯 살에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내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내가 성공했다면,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젊은이들은 더 잘해낼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내게 이 일을 어떻게 해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천 원 한 장에 올인했다고, 천 원을 위해 정직하게 땀 흘렸던 것이 비법이었노라고.

천 원을 경영하면 3조를 경영할 수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아성다이소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고, 2부는 아성다이소가 균일가 전략을 고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았다. 주위에서는 나를 ‘현장 사령관’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현장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부에는 현장에서 내가 늘 강조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소위 말하는 성공이란, 화려하게 주목받는 며칠이 아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끈기 있게 ‘기본’을 묵묵히 반복해온 순간들이 모여 이룬 결과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우리 젊은이들에게, 또 너무 늦은 나이에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선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통해 ‘열정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끝으로 창업 후 30여 년간 나를 지켜준 가족과 1만여 임직원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022년 겨울,

박정부

그 시절 나는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돛단배와 같았다.

옛 상인들이 무역풍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던 것처럼

쉴 새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Part 1. 열정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마흔다섯,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마흔다섯,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19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출근했는데 공장 앞마당에 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풍경이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급하게 회사 대문을 흔들었지만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파업’이 내가 관리하는 생산현장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198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는 민주화 열풍과 함께 기업에서도 노조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장 취업을 통해 들어온 이들이 파업을 주도하면서, 생산 책임자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현장의 지휘체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노조가 결성되고 투쟁과 파업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모든 책임의 화살이 내게 날아왔다. 현장의 최고 책임자로서 위장 취업자들의 선동과 파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경영진과의 갈등도 점점 심해졌다. 간부회의라도 있는 날이면 입술이 마르고 피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차라리 해고를 당했더라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모멸감이었다. 전과 다르게 회의실에서도 가장 말석으로 밀려났고, 회의 중에는 말 한마디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이었고, 그곳에서만 한눈팔지 않고 16년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 생산 책임자로서 최적의 작업조건과 생산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말 하루가 48시간인 것처럼 일했다. 생산성과 수율, 품질 등 생산의 기본 체계를 만들어 설비를 안정시켰고 표준화 체계도 만들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동기들 가운데 승진도 가장 빨랐다. 신입사원이 입사 6개월 만에 계장으로 승진한 사례는 회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케이스라고 했다. 창사 이래 최연소 생산 책임자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파업이 시작된 이후 나는 회사에서 가장 무능한 간부가 되었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일했다. 내 타고난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회사는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런 상황이 2년여 동안 계속되었고, 나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책임을 물어 해고당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회사는 비난의 화살을 던질지언정 업무적으로는 내 능력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동안의 공로 때문에 차마 해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이쯤에서 내가 정리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사직서를 들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만두고 뭘 하려고 그러나?”

사직서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사장이 한마디 했다. 당시 일본에 사는 동생이 기업 해외연수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일을 함께 해볼 생각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듣더니 알겠노라고만 했다.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사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불현듯 아내와 두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늦게 결혼한 탓에 두 딸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가족을 떠올리자 막막함이 밀려왔다. 내가 과연 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한 번도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없었다. 친척들 말에 의하면 9·28 서울 수복 때 북한군이 후퇴하며 아버지를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회사 뒷문에 세워놓고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7살쯤 되었을까. 집은 폭격에 불타버려 아버지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가 그나마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지셨지만, 끼니를 제때 챙기는 것조차 힘겨운 나날이었다. 결국 우리 4형제는 외가로, 큰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셔 힘든 시절을 보낸 나는 단단히 결심한 바가 있었다. 절대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겠노라고. 최소한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지는 곁에 있겠노라고. 그런데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도 끝을 알 수 없는 긴 어둠의 터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해서 가족을 지킬 것인가.

 

며칠이 지나도록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나를 호출했다.

“자네가 여길 나가서 잘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렇다고 꼭 안된다고 할 수도 없을걸세. 그래도 나와 함께 하면 밥은 먹고 살지 않겠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퇴직을 만류하는 제안은 감사했지만 나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제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막 결승점을 통과한 선수처럼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마흔다섯, 과연 내가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동안 너무 전력질주한 것 같았다. 좀 살살 달렸더라면 마음도 몸도 이렇게까지 고갈되진 않았을 텐데. 회사를 떠나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남들의 시선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내 모든 것을 바쳤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난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천 원의 보복

천 원의 보복

 

 

 

 

마침 동생이 일본에서 하던 사업을 접으려던 참이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일본 해외연수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업이었는데, 영업이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국내에서 영업을 맡고 동생이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함께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사무실 하나 얻는 것부터가 녹록지 않았다. 당시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로 건축 붐이 일면서 자재 파동이 났고, 내가 얻으려던 오피스텔의 준공이 늦어졌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던 나는 그해 10월에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서 일단 창업을 했다. 변변한 책상 하나도 마련하지 못해 밥상을 펴놓고 업무를 시작했다. 일본에 기업연수를 보내는 사업이니 이름도 ‘한일맨파워’라고 지었다. 이 회사가 바로 현재 ㈜아성다이소의 모태다.

1980년대 후반에 대기업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한일맨파워’를 통해 해외연수를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세계화, 국제화 바람을 타고 금융, 자동차, 반도체, 건설 등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의 해외연수 사업을 잇달아 따냈다.

일본 현지에서 이루어지는 기업 견학이나 세미나 등은 동생이 진행했기에 나는 그사이에 잠시 짬을 내어 일본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좀 더 안정적인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영업을 뛰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생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니 그리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직장에서 좋지 않게 밀려난 (내가 사표를 내긴 했지만)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 한쪽이 늘 불안하기도 했다.

 

 

잊고 살았던 무역상의 꿈

 

1980년대 이후 일본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환율도 우리나라와 10배 정도 차이가 났다.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을 정도로 반도체 강국이었지만 그에 비해 경공업 기반은 매우 약했다. 비싼 인건비 때문에 제조공장이 거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대부분의 상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건비가 싸고 제조업이 발달한 우리나라 상품을 일본에 팔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문득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역상에 대한 꿈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생산현장의 관리자로 일하느라 아득하게 잊고 있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막연하게나마 무역상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전 직장에서 전구, 샹들리에, 크리스마스트리 등 유리 제품을 제조해서 수출까지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업연수 사업과 함께 틈틈이 무역업을 병행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사는 동생을 통해, 또 지인의 지인을 통해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들을 만나 무엇을 원하는지, 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금씩 탐색해갔다.

처음에는 주로 프로모션 판촉물에 대한 요청이 많았다. 가령 화장품 회사라면 신상품을 론칭할 때 사은품으로 끼워주는 파우치라든가, 가전 회사나 자동차 회사에서 판촉행사를 할 때 나눠줄 열쇠고리 같은 상품을 원했다. 한국에서 적절한 샘플을 찾아 원하는 가격과 수량을, 원하는 날짜에 납품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제품도 찾아야 했지만, 때로는 공장을 직접 물색해 생산라인까지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품질에 대한 기준이 높고 매사에 무척 꼼꼼한 일본 기업들과 거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납품부터 불량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한 주류 도매업체로부터 첫 주문을 받았다. 고객 사은품으로 제공할 유리 재떨이 5,000개를 납품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됐다는 안도감과 함께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실무를 잘 몰라 서류 1장을 만드는 데도 몇 번씩 은행을 다녀와야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고쳐 가면, 또 다른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납품을 했는데, 기쁨도 잠시, 재떨이를 주문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얼른 들어와 확인해보세요. 재떨이가 깨집니다.”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허겁지겁 일본으로 건너가 확인해보았다. 까만 유리 재떨이의 홈에 피다 만 담배를 꽂아놓으니 그 열에 의해 쩍 하고 금이 갔다. 전 직장이 전구회사였기 때문에 유리에 대한 상식은 좀 있었다. 유리를 구울 때 열팽창계수가 다르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가열하다 서서히 풀어주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뭉친 부분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멍 같은 것인데 그 부분에 열이 전달되면 쨍하고 깨진다. 후공정 열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한 나는 전량 폐기 처분했다.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면 결정타가 될 수 있구나.’

 

나폴레옹이 남긴 명언 중에 ‘시간의 보복’이란 말이 있다. 기일을 놓친 고지서가 훗날 이자에 이자가 복리로 붙듯이, 내가 소홀했거나 간과한 실수 하나가 해결하기 힘든 더 큰 문제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가격 경쟁력만 생각하다 품질을 체크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내가 아낀 몇 푼이 불량을 만들었고, 그것이 ‘전량 폐기’로 되돌아왔으니 말이다. 천 원의 보복이었다.

첫 거래에서 신고식을 단단히 치른 나는 다시 한번 작은 것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먼지가 쌓여 태산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작은 실금 하나가 댐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시속 300km/h로 달리는 고속열차도 7mm짜리 불량 너트 하나로 큰 사고가 난다. 이처럼 나의 작은 실수와 무심함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아마 그 첫 거래가 아무 문제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이후에 나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그토록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더 간절한 쪽으로 에너지가 모이는 이치

더 간절한 쪽으로

에너지가 모이는 이치

 

 

 

 

초창기에는 주로 프로모션 판촉물에 대한 상담이었지만 점차 100엔숍 거래처들도 만나게 되었다. 행사상품은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100엔숍은 반응이 좋으면 지속적으로 주문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해외연수 사업 쪽의 일을 줄이고 서서히 저가 생활용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무역업이지 초창기엔 보따리 장사였다. 낡은 자동차를 몰고 동대문, 남대문 시장부터 소규모 공장까지 돌아다니며 거래처에서 관심 가질 만한 생활용품의 샘플을 찾았다. 그리고 일본 각 매장을 돌며 샘플을 보여주고 주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