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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그리고 기타내용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는 누드화…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여인은 누굴까 [슬기로운 미술여행]

by 행복한게이 2025. 2. 9.

김슬기 기자(sblake@mk.co.kr)2025. 2. 8. 18:36

[슬기로운 미술여행 - 9] 마드리드의 프란치스코 고야 이야기

오늘은 프라도 미술관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 거대한 미술관에는 티치아노, 베로네제, 푸생, 루벤스, 바르톨로메 무리요, 호아킨 소로야, 히에로니무스 보쉬 같은 간판 작가들이 많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하려면 천일야화 만큼의 시간도 부족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술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만나고, 또 작은 성당으로 가볼 겁니다. 고야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궁정화가가 담아낸 왕실의 기쁨과 슬픔

Goya y Lucientes, Francisco de [The Family of Carlos IV], 1800 ©Museo Nacional del Prado

프라도 미술관이 유럽의 다른 제국의 미술관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술사의 걸작들을 각국에서 수집해 컬렉션을 완성한 다른 미술관과 달리 온전히 스페인 미술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어떤 작은 미술관을 가더라도 인기가 많은 프랑스 인상파 그림 한두점이 없는 곳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만은 자존심을 지키며 스페인의 미술만으로 이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조차도 스페인 미술의 계보에 포함되는 손님으로서 초청되어 일부 공간만을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미술관이 가장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작가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1818)입니다. -1층, 0층, 1층 모두 고야의 방이 있습니다. 소장품 수는 1207점에 달합니다. 고야는 다재다능한 화가였습니다. 각 층과 각 방마다 고야의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초상화, 태피스트리, 동물 그림까지 주제별로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전기의 작업은 밝은 색채의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The Parasol], 1777 ©Museo Nacional del Prado

고야는 18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화가입니다. 어린 시절 마드리드에서 본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고, 선대 궁정화가였던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가 됐습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성당 등의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며 유명해지면서 왕실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는 1789년에 갈망하던 궁정 화가가 됐고, 1799년에는 마침내 53세의 나이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수석 궁정 화가(First Chamber Painter)가 됩니다. 직후인 다음해 봄부터 그린 <카를로스 4세의 초상>은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고야는 훈장에서부터 의상까지 왕실 가족의 세밀한 모습을 현미경으로 보듯 묘사합니다. 왼쪽의 창에서 스며드는 빛은 인물의 그림자를 만들며 방을 환하게 채웁니다. 이 그림은 색과 빛의 마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미술관의 대표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오마주를 바치는 작품입니다. 왕실 가족을 그린 초상화 왼편에 이젤 앞의 고야가 슬그머니 보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섬세한 사용, 표정과 캐릭터가 다채로운 인물 등도 <시녀들>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 또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입니다.

눈에 띄는 건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왕비(1751-1818)가 그림의 주인공처럼 중앙에 위치한 겁니다. 자세는 <시녀들>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연상시킵니다. 대가족을 거느린 왕후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념사진을 찍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셔터를 누르는 사진사를 기다리는 것처럼 준비된 모습이 아닙니다. 어수선하고 시선은 제각각입니다.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어른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지 않아 복잡한 심경을 드러냅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혼돈이 전 유럽을 강타한 시기였습니다. 강인한 눈빛의 왕비와 달리 왕은 향후 몰락해가는 제국의 운명을 예언하듯 연약하게 묘사됩니다.

실제로 스페인은 18세기를 정점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침공을 연이어 받으며, 제국은 몰락의 길을 향하게 됩니다. 이 왕실 가족의 초상화는 스페인의 영광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그림이었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둔한 표정과 함께 주름까지 그대로 묘사되어 추하게 보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감없이 그려낸 고야의 붓은 가혹할 만큼 솔직합니다.

왕립 소장품 미술관에서도 이보다 1년 전 그린 고야의 왕비 초상화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의상과 표정까지도 무척 흡사해, 훗날의 가족 초상화를 위한 습작처럼 보였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된 뒤 왕후가 보낸 편지에는 고야의 초상화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며 한 칭찬이 적혀 있습니다. 솔직한 그림을 거침없이 그렸던 고야가 미운털이 박히긴커녕 얼마나 왕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벨라스케스와 같은 4개의 못을 그린 고야의 [Christ Crucified], 1780 ©Museo Nacional del Prado

마야 부인의 모델은 누굴까

[Naked Maya], 1795-1800 ©Museo Nacional del Prado

제국의 운명만큼이나 이 화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792년에는 콜레라에 걸려 고열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의 작품은 확연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전기에 그린 왕족과 귀족을 그린 화려하고 밝은 그림들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어둡고 음울하게 변화합니다.

그의 일생을 집요하게 괴롭힌 건 종교였습니다. 고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옷을 벗은 마야>(1795-1800)일겁니다. <옷을 입은 마야>(1800-1807)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종교나 신화가 아닌 일상을 소재로 한 누드화였습니다. 침대에 기댄 전통적인 비너스의 포즈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이 여인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현실의 인물이었죠. 몸을 가리지 않고 정면을 당돌하게 바라보는 여성의 누드는 엄격한 가톨릭 국가의 국기 문란이었습니다.

이 그림으로 종교재판을 받고 고초를 당하면서 그는 다시 옷을 입은 마야를 그렸습니다. 2006년작인 영화 <고야의 유령>은 종교와 반목했던 고야의 이야기를 그린 무척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고야가 사랑했던 여인을 모델로 그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세공해냈지만, 미술관은 이 그림을 소유했던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고도이의 정부 페피타 투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소유했던 그의 실각으로 재산이 몰수되면서 이 그림은 왕실의 소유가 됩니다.

야만의 시대가 빚어낸 검은 회화들

[The 3rd of May 1808 in Madrid, or “The Executions”], 1814 ©Museo Nacional del Prado

이 화가의 인생에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의 반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여러 기록화를 남기게 됩니다. 전쟁의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는 역사적 비극을 기록한 명작입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시민들의 표정과 어지럽게 쌓여있는 시체들, 병사들의 잔인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분노와 연민, 공포까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전쟁뿐 아니라, 자국민을 학살한 만행까지도 냉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그림은 이후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The Pilgrimage to San Isidro],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1812년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면서 그는 돌연 은둔화가가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왕이 복귀했지만 그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마리아와 함께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마드리드 교외에 시집을 한 채 구했습니다.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뜻의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에서 그는 혁명적인 그림인 ‘검은 회화(Black Paintings)’에 빠져듭니다. 1820~1823년 이 집의 벽 전체를 그는 14점의 기괴한 벽화로 가득 채우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망명을 떠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에 에밀 드 에를랑제 남작은 1873년 이 집을 인수해 캔버스에 그림을 옮기면서, 사후 40년만에 그 정체가 알려집니다. 이 방은 미술관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14점의 블랙 페인팅으로만 채워진 0층 전시의 종착지 67번 방은 유난히 어두운 조명 속에서 검디검은 그림들이 고고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대작은 <산 이시드로 순례길>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본능에 굴복한 인간들은 마치 좀비 혹은 괴물처럼 묘사됩니다. 전쟁과 같은 비극 속에서는 밑바닥을 드러내는 인간의 검은 영혼을 그는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죠.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너무나 유명한 그림입니다. 부패한 왕과 귀족, 종교인을 그는 자식을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한 겁니다. 잡아먹히는 아이는 전쟁과 부패로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은유였죠. 이 끔찍한 그림은 그의 집 식탁 앞에 걸려있었습니다. 고야는 이 그림을 보며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Saturn],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저는 옆에 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카라바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비롯해 숱하게 변주된 명작이 고야의 그림보다 더 어둡고 절망적으로 묘사된 적은 없었으니까요. 아시리아 장군의 죽음 또한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벽화 14점의 소재를 고야가 계획적으로 선택했음을 알려줍니다. 화가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자신의 세계에 고립되어 남긴 걸작들인 셈입니다.

기존의 틀을 깬 그의 검은 회화는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작년 프랑스 현대미술작가 필립 파레노의 리움미술관 전시에서도 고야의 검은 회화를 재해석한 영상작업 <귀머거리의 집>(2021)을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장작불의 타는 소리 속에 귀머거리 집 내부의 그림들을 마치 유령처럼 포착해 으스스한 공포를 자아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고야의 유산의 영향력은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Judith and Holofernes],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고야의 천장화가 그려진 작은 성당

정말로 작고 소박한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의 모습. 길 건너에는 고야의 동상이 있었다. ©김슬기

마침내 여행의 종착지에 왔습니다. 고야를 만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공간은 프라도 미술관이 아닙니다. 이곳은 지도를 보고도 쉽게 찾기 힘들 정도로 작고 소박한 성당입니다. 왕궁이나 미술관과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서 꼭 찾아가볼만한 곳입니다.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에는 고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화가는 제단 앞에 묻혔습니다. 고야는 1828년에 프랑스로의 망명 중에 사망했습니다. 신비하게 사라진 머리를 제외한 그의 유해는 1919년에야 프랑스 보르도에서 옮겨졌죠.

1798년 카를로스 4세의 요청으로 거장이 그린 고야의 벽화를 원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두 성당 중 남쪽 작은 예배당은 그의 천장화가 원형대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이 성당의 벽화는 사진으로도 찾기가 힘듭니다. 덕분에 방문객이 매우 적어 저는 10분이 넘게 혼자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닥에 설치된 4개의 거울을 통해 천장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있었죠.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의 고야의 천장화 ©Vivi Smak/Shutterstock

1798년 고야는 6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불과 몇 달 만에 가장 빛나고 혁신적인 천장화를 그려냅니다.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작업할 수 있었던 고야는 단순하고 빠른 붓터치, 풍부한 색상, 다채로운 인물상 등 자신의 특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예배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빛, 생명, 색채의 폭발이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중앙부 돔의 프레스코화는 성 안토니의 기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는 한 젊은 남자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부당하게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 주위에는 전형적인 마드리드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역병의 시대의 피폐한 서민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검은 회화’의 원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돔을 둘러싼 원형벽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천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벽화는 고야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됩니다. 고야의 전기와 후기의 특징을 결합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젖은 회벽이 마르기 전 빠르게 그림을 그려야하는 프레스코화의 특징 때문인지, 여러 인물들은 얼굴이 윤곽으로만 그려진 속도감이 넘치는 화법으로 표현됩니다. 그의 후기작업에 발현하는 표현주의적 기법의 시작을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이 이 벽화를 보아도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종교를 그토록 싫어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신을 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