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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유럽여행 14 - 크라카우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

by 행복한게이 2024. 7. 15.

2019년 10월 15일

오늘은 유태인 수용소를 관광에이전트를 통해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를 방문한다. 아침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6tl40분경에 호텔을 나섰다. 승합차에 타고있는 열댓명의 관광객들이 함께 춯발한다. 여기서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정도의 거리라고 한다. 승합차에서 보는광경은 도시를 빠져서 어느 시골길의 광활한 들판을 지나 외진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전 8시 10분경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몇대도 들어와 있고. 이곳은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방문하는곳이다. 하루에 입장할수있는 입장객이 정해져있고,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서 입장하고, 정해진 루트를 공인된 가이드에 의해서 관람을 하도록 허용하는듯하다. 그래서 주로 에이전트를 통해서 방문여행을 잡고, 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입장하는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입장하기전에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는것이 좋다. 엄청난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서, 한번 관람라인을 이탈하면 다시 복구하기 힘들듯하다. 그래서 화장실 다녀와서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줄서서 입장하는 장소가 게이트로 꾸불꾸불하게 디자인되어있다. 관광에이전트가 사람들이 화장실을 다녀온 다음에 모두 함께 줄서는 라인으로 이동한다. 거기에서는 일단 시큐리티첵크를 통과해야한다. 그래서 아주 작은소지품만 소지하고 가는게 좋다. 시큐리티를 통과한다음에 에이전트가 오늘 가이드를 해주실분에게 사람들을 인계하고, 지금부터는 가이드를 따라서 관람이 이루어진다.

이번에 가이드를 해주시는 아주머님은 관람객들에게 엄숙한 태도로 관람을 해주시를 부탁했다. 가이드를 하시면서도 그고통스러운 감정때문에 힘들어 하실때도 있다고 그러신다. 수용소의 실태를 직접보고 확인하는것은 내가 대학생때 읽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하신 생존자의 수기 "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 " 의 내용보다도 좀더 디테일한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관람하는동안 사람들이 대체로 말이 없고 침울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정신적으로 컨트롤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스스로 하면서 이관람을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고 설명을 듣는것에 바쁘기도 하지만, 내면에서는 이런 상황안에서 이사람들의 삶안에 내자신을 들여놓아 보기도 하고,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살아남을수가 있었다는 놀라움에 치명타를 계속 두들겨맞고, 온몸에 멍이 든 상태에서 관람이 끝을 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수용소는 원래 감옥으로 사용되던것을 유태인 수용소로 변형시켜서 운영한 첫번째 수용소이고, 가장 방대한 규묘이고, 이 수용소를 모델로 다른지역에 유태인 수용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점에서 상당한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가지고있는 사이트로서 중요성도 한몫한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우너래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블럭빌딩의 건축물형태라서 건물이라고 볼수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급하게 만들어진 임시수용소같은곳에 비하면 그나마 건물자체로서는 나은 편의 시설이다. 이곳을 관람한후에 대규모의 유태인들을 지속적으로 수용했던 임시로 설치한 시설물지역이 30분정도 드라이브로 가서 관람한다. 그곳에는 기차가 수용소시설 안으로 들어오도록 레일이 설치되어있고 선로 양편으로 허허벌판에 철조망으로 경계선을 만들어서 그안에 임시 가건물 형태로 수용소를 엄청나게 지어놓았다.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안에, 겨울에 영하 40도까지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 날씨에, 난방시설도 없고, 달랑 몸을 덮을수있는 이불한장에 몸을 맡기며, 나무로 만든 이층침대 막사에 몸하나 누울 정도의 작은공간에 다른 사람들과 살아남기위해 경쟁을 하며 인간의 능력을 모두 끌어모아서 생존하기위해 사는일상을 지냈던 사람들......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죽은 사람이 남겨놓은 물건을 훔쳐가기위해 눈을 밝히고 지켜보며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새벽부터 방늦도록 노예처럼 일에 매몰리다가 쓰러져죽어가는 사람들....그것이 내가 읽었던 생존자의 수기에서 느꺘던 내용들이다. 이것은 마치 현재 북한에서 살아가는 북한주민들의 일상과 매우 흡사한 생활들이다.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을 색출해서 기차에 실은 기차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0분 거리의 임시수용소 시설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내리는 순간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나누어진 줄에 서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헤체되어버린다. 그중에서도 노동인력으로 사용할 가치가 없어보이는 장애인이나, 무력한 노인들, 병든 사람들은 바로 가스실로 향하는 줄로 세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소지품을 반납하게 하고, 신원을 기록하고 번호를 부여한다. 그러면 그후로는 그사람들은 번호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데이터로 취급받게된다. 그런과정이 끝나면 유태인으로 확인되는 죄수복이 주어지고 팔뚝에 ㅅㅏ람들의 번호를 문신으로 새겨넣은 작업을 한다. 그후로는 사람들을 주어진 수용소에 집어넣게된다. 자료에서는 헝가리에서 실려온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려온 유태인중에서 특별히 활용한만한 기술을 가진사람들은 캠프내에서 독일군이 운영에 필요한 일을 하는데 활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문신을 새기는 사람들도 유태인들 중에서 골랐고 여러분야에서 하급일들은 유태인들을 뽑아서 유태인을 관리하는데 이용하기도 했지만, 모든 관리직들은 독일군들로 채워서 독일군이 마치 우수한 인간들인것처럼 보이게 만드려는 의도 이기도 했던것같다.

일단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의 모든 소지품들을 물건별로 파일로 쌓아서 모아두었고, 그중에서도 돈이 될만한 금이빨과 보석들은 챙겨서 나찌 운영 자금을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한듯하다. 그래서 이 수용소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곳은 이런 물품들을 분류하는 일을 하는곳이었는데, 그곳을 사람들은 "카나다"로 불렀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그당시에는 카나다에서는 유럽에서 피신해오는 이주민들에게 무료로 땅을 나누어주고 정착을 허락했었는데...실제로 폴란드에서 카나다로 이주한 사람들이 에드먼튼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살수있어서,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 "카나다" 로 이주해서 사는것이 아주 행복한 삶이라는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드먼튼에는 농사를 주로 짓는 커다란 유크레인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다.

가이드를 따라서 가장 먼저 관람하게 되는곳은, 그들이 빼앗은 유태인들의 물품들을 쌓아놓은 장소들이다. 다양한 물품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있는데,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옷과 신발들이 전시되어있는곳은...사람들이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듯한 충격을 주게 만든다. 세상을 아직 모르고 부모로부터 보호 받아야할 어린이들이 격었을 그 엄청난 고통들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마지막까지 챙기고 있었던 여행가방에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을 써놓은것을 보면, 그들이 그 가방을 다시 찾을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하며 끝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곳이 어떤곳인지도 모르고 흘러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지나서 이제는 실제로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내부를 구경하러 건물속으로 들어간다. 조그만방에 몇명이 같이 지내는방...그리고 홀웨이의 구역별로 별도의 철장을 만들어 놓고, 독일군들이 배치되어서 그 안의 사람들을 감시하게

했다. 공동화장실..배급되는 소량의 식사..그리고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에는 특히 여성들이 임신을 못하게 만드는 생체실험도 하고, 여러가지 약품으로 사람들을 생체실험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때는 그벽에 구멍이 몇개씩 보였는데, 그곳은 사람을 직접 총살시겼던 흔적이라고 그런다.

이 수용소의 빌딩숲 중앙에는 "레드콜" 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수용소사람들중에 도망친사람이 있거나 수용소로 돌아오지 않은 인원들이 있을때, 수용소 사람들을 불러세워서 그 추운날에서 몇시간씩 야외에서 서있게 만들었다는...그리고 그곳에서 공개처형을 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장치로 이용했다는 ...

아무튼, 이 수용소의 몇개의 빌딩을 관람을 하고 마지막으로 이동하는곳은 가스실이 있는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에게 샤워하는것이라고 속이고, (입구에는 "샤워실" 이라고 히브리어로 쓰여져있다.) 건물룸안에 밀어넣어서 철창문을 잠그고는 독가스를 살포해서 대규모의 유태인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질럿던 비명과 고통속에서 피를 흘리며 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던 처참한 상황들이 그대로 벽에 기록되어있다. 그렇게 독살한 시체들에서 금이빨과 보석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했다는것도 끔찍하다. 그리고는 그옆에 설치는곳에 시체를 넣고 불태워서 가루로 만들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정보를 없애버려서 증거를 인멸하는 과정을 했다. 그래서 그당시에는 하루종일 시체를 태우는 냄새로 진동을 했고, 굴똑에서는 연기가 하루종일 올라왔다고 수십킬로미터 밖에서 사는 그당시의 주민들이 증언했다고 한다.

전쟁의 마지막에는 독일군들이 이 시설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소 시설을 파괴하고 각종자료들도 소각시키는 작전을 하면서 퇴각을 해서, 이제는 아주 미미한 그 일부분의 증거자료만이 그 시설에 남아있다.

그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해서 폴란드를 독일의 땅처럼 사용하면서 벌어진 이 상황이 지금은 폴란드에 증거로 남아있다. 그래서 독일은 전쟁을 끝내고, 그들이 나찌라는 괴물로 등장해서 유럽국가들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금은 독일은 교육적으로 나찌가 세계전쟁에서 한일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세계에 사죄를 하고, 이런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어린이부터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과거 독일역사의 잘못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세계에서 전쟁후에 복구하는 자금을 지원받았고, 그래서 이제는 유럽에서 당당한 국가로 성장해왔다.

그당시에 독일인들이 나찌가 유태인들에게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던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실제로 여론화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것은 나찌에 동조한 책임을 같이 지어야 한다는점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독일은 세계전쟁에서 나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일체의 변명도 허락하지 않고, 모든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는것만 허용된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과 동맹을 맺고 아시아에서 일본군이 행한 과거사를 통해서 현재의 일본정부의 태도롤 비교해봐야 한다. 명백한 불법으로 한국의 주권을 가로챈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끝까지 무수한 고통을 안겨주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해왔던 일본의 과거사를 일본정부는 제대로 반성하고 사죄하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면서 아시아에서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조장하는데 오랜시간동안 로비를 하며 경제력을 낭비하고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항복을 하며 전쟁을 끝냈던 일본이 , 마치 자신들이 세계전쟁의 희생자인양 포장하고서 자신의 과거사를 왜곡된 내용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는데, 일본정부의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본이 항복을 한후에 미국으로 부터 전후 복구자금을 지원받아서 경제적 성공을 이루어왔고, 그 경제력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는데 자금을 쏫아붓고 로비를 하면서 역사적사실을 은펴히키고 국제사회에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심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시아에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국과, 이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본은 공통적으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총력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효과가 진실을 왜곡하게 만들지는 못할것이다.

세계는 정직한 학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를 판단하고 정리하고 있다. 몇명의 경제대국 일본이나 중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서 왜곡된 역사를 확산시키려고 한다고 해서, 그 역사적 사실이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본이 지금이라도 국제사회에서 리드하는 경제대국의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고 싶다면, 일본내에 오랫시간동안 부플려온 극우성향의 정치인과 역사학자들을 사실에 기반한 역사학자들과 상식을 가진 정치인들로 바꾸려는 노력을 국민들이 해야하는데, 일본 국민들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나 동력을 만들어내는데 상당히 무능한 국민성향들이다. 그저 정부가 바라는대로 따라가고, 정부가 원하는대로 발을 맞추는 아주 수동적인 국민들 성향에다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결국은 읿본 스스로 자살을 향해서 가고있는 형국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는 스스로 꼬꾸라 지면서 활복자살해야 지금과는 다른사회를 만들고 싶은 세대의 정치인들이 나오지 않을려나 싶다.

활복자살로 모든 의문의 꼬리를 자르고 모든 잘못을 뒤덮어쓴채로 사라지는것이 일본사회의 전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다른말로 한다면,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누군가를 한사람 내몰아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 그사람에게 뒤덮어서 해결하려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권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다. 그래서 합리적인 해결을 하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누군가 그 책임을 다 떠안고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아주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것을 보장해주고 지지해주는 국민들의 성향이다. 그래도 국민 각자의 책임도 그사람들과 같이 다 털어내버리려는 국민들....수동적이고 무능한 국민들이다. 일본인 개인의 장점은 한가지를 끝까지 깊게 파고드는 장점을 가진 반면에, 사회 공동체로의 일원으로서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상당히 무능한 수동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들이 일본안에서의 시각에 갇혀서 살아가는것도 일본사회의 특징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유태인 수용소를 다 돌아보고, 크라카우로 돌아가야할 시간... 승합차에 오르기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자안에서 점심을 해결할생각으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두개사서 차에 올랐다. 크라카우에 도착하니 오후 1시반정도... 그래서 우리는 광장에 갔다가 오늘은 유태인 게토를 프리 워킹 투어하는뷴이 있어서 그분의 투어를 오후 2시부터 따라가기로 했다. 그래서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더워서 아이스 드링크를 사러 다녀왔다. 거기서부터 유태인 게토까지는 대략 20분정도를 걸어간다. 유태인 게토에는 아직도 히브리어 간판을 그대로 간직한 레스토랑들이 몇개 줄지어 서 있다. 그곳에는 유태인 예베당인 세네각도 있고, 그 옆에는 유태인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을 지나서 유태인이 묵었던 호텔로 지나가고, 유태인들이 거주하던 지역도 지나가고, 광장의 농부들의 마켓도 지나가면서 강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독일 나찌상황 아래에서 유태인을 고용해서 공장을 운영했던 고용센타 오피스건물이 나온다. 유태인을 구조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쉰들러가 운영했던 제조품 공장이 쉰들러 박물관 으로 지금은 살아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로 알려진 쉰들러의 내용은 유태인을 수용소로 보내지는 위험에서 벗어나서 제조공장에서 일하는것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할수있는 기회를 준것도 사실이다. 쉰들러는 독일 나찌 공산당 당원이면서, 나찌; 공산당에서 높은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협력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는 비지니스맨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독일 나찌에 공조한 면이 있고, 반면에 유태인들을 나찌의 인종학살대상에서 구해준 면이 있어서, 그당시의 상활에서 양면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척한 사람으로도 평가될수 있다.

이곳을 지나서 다시 광장으로 진입했는데, 이 광장에는 유태인 청소년들이 나찌와 싸우고 투쟁했던것을 기념하는 빈의자들이 광장에 널려져 있다. 빈의자들에 로프로 채워져서 유태인 청소년들의 자유를 억압하는것을 상징하는 전시물이다.

이 광장에서 유태인 청소년들이 모여서 나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투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이드분의 유태인 게토 투어는 끝났다. 그래서 성의껏 사람들이 투어에 감사하는 돈을 기부를 하고 헤어졌다.

그곳에서 대략 5분정도 거리에 쉰들러 의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는데,, 조그만 박물관 로비에는 쉰들러가 구했던 유태인들의 초상화 사진들이 벽에 장식되어있었다. 그런데 뮤지엄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라

이곳에서 대충 로비를 둘러보고 나와서는 거리를 걸어서 그주변에 가게에서 소시지와 과자들을 사서 호텔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